금융위원회가 추진한 ‘대환대출(대출 갈아타기) 플랫폼’의 10월 출범이 사실상 무산됐다. 최근 취임한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대환대출 플랫폼 재검토 의사를 밝히면서다. 전임 은성수 위원장의 정책 기조를 뒤집은 셈이다.
대환대출 플랫폼은 모바일 앱에서 시중은행, 저축은행, 카드사 등 금융기관의 대출 금리를 비교하고, 금리가 낮은 곳으로 손쉽게 갈아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다. 다양한 금융기관이 참여하고 서비스 범위가 넓을수록 소비자 편익이 커진다.
당초 금융위는 업계 의견을 통일해 오는 10월 대환대출 플랫폼을 출범할 계획이었지만, 은행권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었다. 금융권 일각에선 대환대출 플랫폼이 출범 연기를 넘어 아예 좌초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고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취임 후 가계부채, 가상자산거래소 관리, 취약계층 금융지원 등을 우선 과제로 업무를 추진 중이다. 은 전 위원장 시절 중점 정책이었던 대환대출 플랫폼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게 금융권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는 고 위원장의 발언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지난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환대출 플랫폼은) 재검토 기한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걸려도 충분히 협의하겠다”며 “(핀테크·빅테크 기업이 가져가는) 수수료를 포함해 여러 문제를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앞서 고 위원장은 지난달 인사청문회에서도 대환대출 플랫폼과 관련해 “협의가 더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논의를 더 진행할 계획”이라며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위가 지난 1일 빅테크 기업들과 진행하기로 한 대환대출 플랫폼 간담회가 취소된 이후 일정도 다시 잡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은 다른 업권과 달리 당국의 영향력이 큰 만큼 금융위가 추진하던 정책을 업계 반발로 한발 물러선 것은 이례적이란 분석이다.
논란의 시작은 금융위가 대환대출 플랫폼 구축 논의에 돌입하면서 은행 등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면서다. 논의가 진행될수록 대출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시중은행들의 반발이 커졌다. 대환대출 플랫폼이 카카오, 토스 등 빅테크·핀테크 기업들이 주도해 운영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은행권의 명목상 반대 이유는 수수료다. 빅테크 기업들이 플랫폼을 주도하면서 수수료를 과도하게 인상할 수 있다는 게 기존 은행들의 주장이다. 현재 대출 비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부 핀테크사는 중개수수료로 제1금융권에서 0.2~0.6%, 제2금융권에는 1~2% 수준을 각각 받고 있다.
카드사들도 마찬가지다. 카드론 등 카드사 대출은 중도상환 수수료가 없어 주로 단기 이용이 많은데, 금리 수준까지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되면 소비자들의 갈아타기가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수수료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존 금융사들이 빅테크에 완전히 종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특히 시중은행이 인터넷전문은행에 시장 파이를 뺏기는 상황에서 대환대출 플랫폼마저 출범하면 빅테크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시중은행은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 대환대출 플랫폼을 만든다는 카드를 꺼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환대출 플랫폼은 수수료 문제도 있지만 대출 상품이나 고객 정보 등 은행이 가졌던 경쟁력을 눈 뜨고 빼앗기는 것과 같다”라며 “은행연합회 주도 플랫폼도 개별 은행 입장에선 반갑지 않지만, 금융당국 정책에 맞추기 위해 차선책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은행권의 독자 플랫폼 구축을 허용했지만 시중은행과 빅테크·핀테크가 대환대출 플랫폼을 각각 구축하면 ‘반쪽짜리 플랫폼’이 불가피해진다. 업계 조율이 안 된 상황에서 서비스를 무리하게 출범하면 졸속정책이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대환대출 플랫폼이 시행되면 ‘증액 대환’이 증가, 개별 은행의 가계대출 총량 컨트롤에 어려움이 생겨 ‘대출 조이기’ 정책과 충돌한다는 지적도 금융위 입장에서 부담이다.
향후 대환대출 플랫폼이 출범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은 나뉜다. 오는 12월 출범을 목표로 한 은행권의 독자적 대환대출 플랫폼도 미지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은성수 위원장을 포함해 대환대출 플랫폼 정책을 주도했던 실무 국장마저 다른 부서로 옮긴 상황에서 출범 연기가 아닌 사실상 무산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과거 계좌이동제 및 오픈뱅킹 논란 때처럼 대환대출 플랫폼도 ‘소비자 편익 증대’라는 대의적 차원에서 업계가 계속 거부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일정은 연기되더라도 수수료 등 세부적인 문제 등만 해결된다면 대환대출 플랫폼은 어떤 형태로든 출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업계 의견 수렴 중으로, 현재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