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40여 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헤지(hedge·위험회피) 자산으로 꼽히는 금(金) 가격이 심상치 않다.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는 시기인 만큼 금값이 뛰어야 하지만, 도리어 하락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7월 29일 기준 국제 금값은 전날보다 24.91달러(1.43%) 오른 온스당 1766.1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올해 3월 8일 종가 기준 2009달러를 웃돌았던 금값은 이후 12% 이상 하락했다.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1800선을 웃돌았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4일(현지 시각) 국제 금 선물 가격이 4개월 연속 하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2020년 11월 이후 가장 긴 하락세다. 통상 인플레이션을 방어하는 투자처로 꼽히는 금의 역할이 퇴색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 배경이다.
국제 금 선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주식시장에서 금 관련주로 분류되는 기업 주가도 덩달아 낙폭을 키웠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금광회사 배릭골드와 뉴몬트는 10% 넘게 하락했고, 반에크 금광주 상장지수펀드(ETF)는 7% 이상 하락했다.
국제 금값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국내 금값과 관련 상장지수펀드(ETF)도 부진하다. 지난달 29일 국내 금값은 종가 기준 1g당 7만3760원이다. 지난 3월 8일(7만9930원)과 비교해 8% 가까이 하락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금 선물 가격을 두 배로 추종하는 KINDEX골드선물레버리지(합성) ETF는 16.5% 하락했다.
투자자들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이 본격화한 것이 금값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연준 금리 인상이 미 국채 수익률을 높이는 가운데 또 다른 안전자산인 달러화 강세를 부추기면서 금의 상대적인 매력도를 떨어트렸다는 것이다.
앞서 연준은 7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또 한 번 ‘자이언트 스텝’(한 번에 금리를 0.75%포인트 인상)에 나섰다. 팬데믹 이후 연준은 2년간 제로금리를 유지해왔지만, 지난해부터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면서 3월(0.25%p), 5월(0.5%p), 6월(0.75%p) FOMC마다 금리를 올렸다. 6월 자이언트스텝은 1994년 이후 2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월가 안팎에선 앞으로도 금값이 향후 경기 상황과 연준의 통화정책 행보를 주시하며 변동성을 키울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7월 FOMC에서 추가 금리 인상 속도가 조절될 수 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면서, 금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산 가격은 일시적으로 반등했다.
다니엘 갈리 TD증권 애널리스트는 “당장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9월 자이언트스텝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자산 시장의 쇼트커버링(공매도한 주식을 다시 사서 되갚는 행위) 랠리를 야기했다”며 “그럼에도 금 시장은 추가 변동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블룸버그는 투자자들이 오는 8월 5일 발표되는 미국 고용 지표(7월 고용 보고서)에 주목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정부와 연준은 견고한 고용 시장을 근거로, 현재 미국이 경기 둔화 국면에 접어든 것은 맞지만 경기침체(리세션)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일 대형 은행 중 하나인 코메리츠방크는 “추후 발표되는 경제 지표들이 하나둘 약세로 판명되면, 금은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고용 지표 외에도 소비심리, 구매관리자지수(PMI) 등 서베이 지표, 3분기 실물 지표가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지표들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연준도 더 이상 자신 있게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9월 이후 연준은 경기 부진을 반영해 베이비스텝(한 번에 금리 0.25% 인상)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고, 장기 금리가 하락해 금 가격 반등을 이끌 수 있을 전망”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