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꾸준히 제기된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경제 성장률 전망치의 하향 조정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고물가를 잡기 위해 강도 높은 긴축에 나설 것을 공개적으로 시사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증권가에서는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쪽에서는 우리 물가지수가 미국을 따라 정점을 통과하고 긴축에 대한 우려도 완화될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물가 상승이 고용과 생산 및 소비 둔화로 이어지며 악순환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美 물가 정점 통과했다…실질 금리 낮아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재현 안 될 것”
‘물가 정점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최근 나온 미국의 물가 지표다. 27일(현지 시각) 미 상무부에 따르면, 4월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6.3%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3월 상승폭(6.6%)보다 낮은 수치다. 유가 및 식료품 가격을 제외한 근원PCE 가격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4.9% 상승했다. 이 상승률 역시 3월(5.2%)과 비교해 낮아졌다. 근원PCE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에 주로 참고하는 지표다.
PCE의 상승세 둔화는 이달 초 발표된 소비자물가지수(CPI)의 정점 통과와 궤를 같이 한다. 지난 11일(현지 시각) 미 노동부는 4월 CPI가 전년 동월 대비 8.3% 올랐다고 발표했다. 3월 상승률(8.5%)과 비교해 소폭 낮아진 수치다.
윤석모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4월 물가지수의 하락폭이 크지는 않으나 숫자가 빠진 것은 사실”이라며 “물가가 어느 정도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국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상무)는 “미국의 물가지표는 3월이 고점이었을 것이며, 한국 역시 글로벌 공급망의 병목현상과 원자재 가격의 급등이 진정 국면에 접어든 만큼 2분기 중 물가가 정점을 형성하고 하락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후 3분기에는 인플레이션 하락이 완전히 확인되고 투자 심리가 어느 정도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광남 미래에셋증권 연구원도 “미국에서는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이 앞당겨져 이미 수요의 둔화 움직임이 포착됐으며, 이는 기대인플레이션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상무는 물가의 추가 상승뿐 아니라 경기의 침체 가능성도 낮다며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던 지난 197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경제 주체들의 건전성이 양호하고 실질 금리가 높지 않아 경제를 이중으로 압박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다”며 “연준이 긴축을 무리하게 진행하지만 않는다면 경기 둔화가 침체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생산 비용 높은 ‘나쁜 인플레이션’…이미 스태그플레이션 단계 진입”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 25일 한국경제연구원이 개최한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이미 스태그플레이션 단계에 진입했다는 비관론을 내놓았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재 우리 경제는 공급 비용의 상승이 유발한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놓여있다”며 “노동 시장 경직, 금리 인상 등 긴축적 통화정책, 추가경정예산(추경) 집행 등이 스태그플레이션 압력을 점점 더 높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지난해 7월 100.87를 기록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는 4월 100.16으로 하락했다. 반면 OECD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8%로, 두자릿수를 기록했던 198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19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셈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쪽에서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물가 상승이 본질적으로 고용·생산·소비 둔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생산 비용이 높아지고 기업은 고용과 생산을 줄이게 된다. 김효진 KB증권 연구원은 현재 세계 경제가 생산 비용의 상승 단계에 있다며, 앞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김준영 흥국증권 연구원은 현재 세계 경제가 ‘나쁜 인플레이션’의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수요가 견인하는 인플레이션이 기업의 수익 증대를 낳는 ‘좋은 인플레이션’이라면, 현재 나타나는 고물가는 공급망의 병목현상이 낳은 나쁜 인플레이션이라는 얘기다.
김 연구원은 “공급망이 극적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물가 과열 상태가 길어진다면,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한 비용이 더 늘어날 것”이라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고착화할 지 계속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현실화 가능성을 둘러싼 증권가의 시각이 엇갈리는 가운데 우리 증시의 향방은 점점 더 전망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한·미 양국의 중앙은행이 모두 고물가에 초점을 맞추며 강도 높은 긴축 의지를 재확인했으며, 경기 둔화가 지속됨에 따라 기업 실적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 상무는 “증시 조정기의 전반부에는 통화 정책에 따른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주가 수준)의 하락이 나타난다면, 후반부로 갈 수록 펀더멘털(기초 체력)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코스피지수의 반등 여부를 판단하려면 경기 둔화의 정도와 기업 이익의 방향성을 더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