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학교 출신 창업가에 대한 벤처캐피털(VC)들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나 카이스트 출신이 창업한 신생 스타트업을 ‘안전 자산’으로 보고 수십억원을 투자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특히 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증시 조정으로 인한 비상장주식 시장의 침체에 기인한다. 작년과 달리 비상장 스타트업들의 기업가치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사례가 속출하자, VC들이 중·후기 기업보다는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추세다. 초기 기업은 투자 후 엑시트(투자금 회수)까지 7~8년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시장 조정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처로 인식된다.

사업 아이템이나 시장성보다는 창업가를 보고 투자해야 하는 시드(seed)나 프리(pre)A 등 초기 단계의 특성 상, 성공한 벤처 창업가를 많이 배출해 인적 네트워크가 탄탄한 서울대나 카이스트를 졸업하면 투자 유치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지난달 초 SK텔레콤이 MWC22의 부대행사인 4YFN(4 Years from Now)에서 다양한 스타트업들의 혁신 아이디어와 기술을 선보였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SK텔레콤 제공

2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 18일 코딩 교육 스타트업 브랜치앤바운드가 VC 끌림벤처스에 10억원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작년 6월 설립돼 업력이 1년도 안 된 신생 기업이다. 끌림벤처스는 투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창업가들의 역량을 가장 중요하게 본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 멤버 3명이 모두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출신인데다, 이승용 대표이사가 국제정보올림피아드(IOI) 은메달리스트라는 점을 높이 샀다.

이달 20일 KB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10억원의 프리시드(pre-seed) 투자를 받은 콘텐츠 전송 네트워크 기반 인공지능(AI) 솔루션 업체 드랩 역시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이 주축이 돼 설립한 스타트업이다. 이주완 대표는 카이스트에서 학·석사를 취득했으며, 공동 창업자인 김태훈 이사와 김민주 이사는 각각 서울대와 카이스트에서 AI 관련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회사는 올해 3월 설립돼, 업력이 브랜치앤바운드보다도 더 짧다.

지난달 시리즈A 이하(시드·프리A·시리즈A) 투자를 유치한 국내 스타트업 중 대표이사가 서울대 출신인 회사는 최소 9개에 달한다. 대표이사 외의 핵심 멤버가 서울대를 졸업한 회사나 카이스트 출신이 창업한 곳까지 더하면 수십 개로 늘어난다.

유학 준비생 과외 플랫폼 튜블릿의 경우 작년 말 설립된 신생 기업인데도 패스트벤처스, 위버스마인드로부터 10억원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카카오벤처스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은 영상기기 솔루션 업체 프로이드 역시 작년에 설립된 신생 기업이다. KB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15억원의 시드 투자를 받은 라굿컴퍼니도 업력이 1년이 채 안 됐다.

일부 대학 출신 창업가에 대한 선호는 VC의 시장 조정기 대처 전략의 일환이다. VC들이 증시 조정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초기 기업들에 투자하려다 보니 창업가들의 ‘스펙’이 중요해졌고, 벤처 업계의 전통 강자인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이 과거보다도 더 대우 받게 됐다.

지난해 말부터 증시가 하락하며 비상장사들의 몸값도 하락하자, 엑시트(투자금 회수)가 임박한 후기 기업부터 타격을 입고 있다. 한 VC 관계자는 “벌써 프리(pre)IPO 단계에서는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가격 수준)의 하향 조정 논의가 흔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비상장사들은 기업공개(IPO)시 동종 업계 상장사들의 시가총액을 참고해 밸류에이션을 산정해야 하는데, 증시 조정으로 상장 기업들의 주가 하락이 보편화되자 비상장사의 몸값도 함께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스타트업의 몸값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지만 VC들이 쌓아 놓은 투자 재원은 넘치는 상황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결성된 벤처 펀드의 조성액은 총 9조2000억원이 넘는다. 운용되고 있는 펀드의 규모는 총 41조2000억원에 육박한다. 전년도(33조2000억원)에 비해 대폭 늘었다.

투자금을 소진해야 하는 VC 입장에서는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이 최선이다. 펀드 운용 기간이 7~8년에 달하는 VC업의 특성 상, 초기 기업에 투자하면 시장 조정기를 피해 시간을 벌 수 있다. 조정기에 낮은 밸류에이션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해 놓고 증시 회복과 기업가치 상승을 기다릴 수 있어, VC에는 오히려 좋은 ‘기회’로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올해 1분기 국내 VC들의 신규 투자 통계를 살펴보면, 전체 투자금의 28.2%가 초기 기업에 투입됐다. 지난해 초기 기업 투자 비중(24.2%)과 비교해 다소 높은 수치다.

한 VC 임원은 “업력이 너무 짧은 초기 기업의 경우 제대로 된 제품이나 이렇다 할 실적 지표가 없기 때문에 창업가가 누구인지를 많이 보고 투자할 수밖에 없다”며 “서울대나 카이스트 출신은 스타트업 및 벤처 생태계에서 양질의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해당 학교 출신 몇명이 모여 회사를 차렸다고 하면 ‘빨리 시드 투자부터 하고 보자’는 VC가 많다”고 말했다.

창업가가 서울대, 카이스트를 졸업한 데다 과거 창업을 해 엑시트한 경력까지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투자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 드랩이 대표적인 예다. 카이스트 출신 이주완 대표는 지난 2017년 삼성전자에 매각된 AI 스타트업 플런티의 공동창업자였다.

VC 관계자는 “과거에도 초기 스타트업의 기업가치 산정에 있어 ‘서울대 출신 개발자는 한 명당 10억원씩 쳐준다’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있었다”며 “특정 대학 출신에 대한 선호 현상은 초기 투자 비중이 높을 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