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간 전쟁이 길어지면서 ‘애그플레이션(agflation·농산물 가격 급등이 주도하는 일반 물가 상승)’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적 곡창지대로 꼽히는 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작물 재배가 어려워지고, 수출 통로도 꽉 막힌 탓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식량 위기에 봉착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곡물

러시아·우크라이나는 세계 각국에 밀, 옥수수를 공급하는 주요 수출국이다. 두 나라가 전 세계 밀 공급량 중 약 30%, 옥수수는 20% 정도를 차지한다. 농업 환경이 열악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이유다. 해바라기유, 보리 역시 주요 수출 품목이다. 두 나라가 전 세계 농산물 공급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셈이다.

이번 전쟁으로 많은 국가가 식량 안보를 위협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서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아프리카·아시아 등 주요 수입국 내 정치적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다. CNN비즈니스는 9일(현지 시각) 식료품, 에너지 등 물가 급등에 생활고를 겪고 있는 중동,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정치적 불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지난 2011년 밀값 폭등으로 촉발된 ‘아랍의 봄’이 재현될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우려스럽게도 전문가들은 농산물 가격이 당분간 계속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종자, 비료를 제때 구하지 못해 봄철 파종 시기를 놓쳤고, 주요 항구도 폐쇄된 탓이다. 이 같은 상황으로 올해 우크라이나의 옥수수 수확량이 1900만톤으로 지난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2022~2023년도 소맥과 옥수수 가격은 현재 수준에서 10%~20%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농축수산물 수입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밥상 물가에도 빨간 불이 커졌다. 지난 4일 한국무역통계진흥원은 올해 2월 농축수산물 수입가격지수는 112.6(2015=100)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1.7%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2월(33.5%), 올해 1월(31.5%)에 이어 3개월 연속 30% 이상 뛰었다.

농축수산물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생산자물가, 소비자물가가 차례대로 오르는 도미노식 상승세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16.46(2015년 100기준)으로 전달 보다 1.3% 올라 3개월 연속 상승했고 밝혔다. 생산자가 시장에 공급하는 상품, 서비스 등의 가격이 매월 오르고 있다는 의미다.

당장 먹고사는 걱정을 토대로 대대손손 막대한 돈을 버는 기업도 있었다. 밥상 물가를 쥔 곡물 기업들의 몸값이 가파르게 올랐다.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 번지(BUNGE), 카길(Cargil), 루이드레퓌스(LDC) 등 세계 4대 곡물 기업을 묶어 부르는 이른바 ‘ABCD’다. 4개 회사가 전 세계 곡물 교육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곡물에 이어 동물 사료, 바이오 디젤 등에도 진출했다. 여기서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 번지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나머지 두 회사는 비상장사다.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 인베스팅닷컴 캡쳐

밥상 물가에 대한 걱정이 커지면서 주가도 급등했다. 번지 주가는 21일(현지 시각) 종가가 122.33달러로, 연초 대비 30% 넘게 상승했다. 같은 기간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는 40%가 뛰었다.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매 분기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한 덕이다. 국내 곡물 기업의 주가가 널뛰는 이유도 같은 연장선에 있다. 애그플레이션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래저래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의 가계만 어려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