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시중 자금 20조원을 빨아들이며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린 기업공개(IPO) 시장이 영 시들해졌다. 연초부터 총 7개 기업이 상장 절차를 중단했으며, 현 주가가 공모가보다 20~30% 낮은 수준까지 떨어진 회사도 6개나 된다. 신규 상장사가 줄줄이 ‘따상(공모가의 2배에 시초가를 형성한 후 상한가)’에 성공했던 작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지난 3월 22일(현지 시각) 뉴욕증권거래소에 포지글로벌홀딩스의 상장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당초 상반기 중 IPO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던 회사들도 잇달아 상장 일정을 연기하고 있다. 신선 식품 플랫폼 ‘컬리’를 운영하는 마켓컬리가 상장 예비심사를 이달 중 청구할 예정이며,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아직 상장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IPO 시장 경색은 비단 우리나라 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 최대 증권 시장인 미 뉴욕 증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 22일(현지 시각)까지 미국에서 IPO를 통해 자금을 공모한 회사는 22개에 불과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79개 기업이 IPO에 나섰던 것과 비교해 현저히 줄어든 수치다. 공모 금액도 360억달러(약 44조원)에서 23억달러(약 2조8000억원)로 급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그릭요거트로 유명한 초바니(Chobani)가 최근 IPO 일정을 올 하반기 이후로 미뤘으며, 상반기 중 상장하겠다고 밝혀온 소셜미디어 플랫폼 레딧(Reddit)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IPO 관련 서류까지 제출해놓고 상장 작업을 보류 중이다. 그 외에도 스웨덴 핀테크 기업 클라나(Klarna), 미 핀테크 차임(Chime)파이낸셜 등이 상장 계획을 유보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한파가 미 IPO 시장에까지 불어닥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물가가 전세계를 휩쓸며 금리 인상 압력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중국에서는 선전에 이어 최대 경제 도시 상하이까지 봉쇄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어, 지난해 세계 경제에 타격을 입혔던 공급망 차질 이슈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 미국 시장만 경색을 피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미 IPO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옥석 가리기’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WSJ에 따르면, 증권 업계 관계자들은 ‘5억달러 이상을 조달할 수 있으며 각 산업군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흑자 기업’들이 얼어붙은 IPO 시장의 부활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 콘택트 렌즈 기업 바슈롬이나 인텔의 자율주행 자회사 모빌아이가 대표적인 예다.

수익 창출 여부가 IPO의 흥행을 가를 수 있다는 가설은 데이터로도 증명됐다. 미 투자은행 웰스파고에 따르면, 지난해 5000만달러 이상을 공모한 신규 상장사 가운데 흑자 기업의 공모가 대비 평균 주가 하락률은 11%에 그쳤다. 반면 이익을 내지 못하는 신규 상장사들은 공모가 대비 평균 46%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IPO 시장의 ‘안정 지향적’ 성향이 강해지면 대규모 적자를 내는 IT 스타트업들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익은 전혀 나지 않으나 투자를 많이 유치해 몸값이 지나치게 불어난 ‘유니콘(시가총액이 1조원 이상인 스타트업)’이나 ‘데카콘(시가총액이 10조원 이상인 스타트업)’들이 특히 위험하다. 이들 기업은 비상장 시장에서 추가로 자금을 조달하는 데 한계가 있어, 기존 투자사들 입장에서는 IPO를 통한 엑시트(투자금 회수)가 필수적이다.

실제로 국내외 벤처 투자 시장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감지하고 보수적 성향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최근 만난 국내 벤처캐피털(VC) 대표들은 “올해는 이익을 내고 있거나 이른 시일 내에 흑자로 전환할 수 있는 스타트업 위주로 선별적 투자를 진행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결성된 벤처 펀드 규모는 총 1280억달러(약 157조원)에 달하는데, 많은 펀드들이 비상장사보다는 상장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VC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자본시장을 둘러싼 매크로(거시) 환경이 언제쯤 개선될 지, IPO 시장의 투자 심리가 언제 되살아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유니콘과 데카콘 기업이 잇달아 등장한 지난해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IPO 투자자들도 ‘공모주 투자 대박’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김동환 하나벤처스 대표의 표현대로 ‘잔치는 끝났다’. 이제는 묵묵히 그 다음 잔치를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