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군에 우크라이나 진입을 명령했으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잇달아 자산동결 등 대러시아 제재 강도를 높이며 맞불을 놓고 있다. 전쟁이 현실로 다가옴에 따라 우리 주식시장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극에 달했다. 지난해 말부터 코스피지수에 가해진 하방 압력은 전쟁 개시 이후 한층 높아지게 됐다.

개인과 외국인 투자자는 전쟁 우려가 본격화된 이후 상반된 매매 패턴을 보이고 있다. 개인 투자자는 현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주가 수준)을 저점으로 인식하고 연일 ‘사자’를 지속하는 반면, 외국인은 순매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상반된 모습은 과거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지정학적 위기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개인은 사태 발생 직후 주식을 대거 쓸어 담은 반면 외국인은 순매도했다. 외국인은 코스피지수가 저점에 도달하면 순매수로 전환했고, 이를 통해 차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이은현

◇ 개인, 테러·전쟁 직후 대량 매수해 물렸다…외국인은 저점에 사들여

24일 조선비즈는 과거 ‘세계지정학적위험지수(GPR)’가 300 이상으로 치솟았던 두 번의 지정학적 리스크 당시 국내 증시에서 나타난 개인과 외국인의 매매 패턴을 분석했다. GPR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1900년부터 현재까지 세계 지정학적 위험도의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개발한 지수다. 2000년 이후 GPR이 300을 넘었던 때는 2001년 9.11 테러와 2003년 이라크 전쟁 뿐이었다.

한국거래소의 통계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는 9.11 테러로 전세계 증시가 직격탄을 맞은 다음 날인 2001년 9월 13일(한국 시간) 바로 순매수로 전환했다. 개인은 같은 달 말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총 3400억원어치를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외국인은 개인과 달리 총 3800억원을 순매도하다, 코스피지수가 460대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사자’로 돌아섰다. 외국인은 그 해 9월 말 이후 연말까지 총 3조4000억원어치를 사들이며 코스피지수의 700선 탈환을 견인했다.

이 같은 패턴은 2002년 10월 이라크 전쟁 위기가 본격적으로 불거졌을 때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2002년 10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결정되자 우리 증시에서 개인은 즉시 ‘사자’ 행보를 이어갔고, 10월 초 8거래일 간 57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이 기간 외국인은 2800억원을 순매도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후 코스피지수가 590 밑으로 떨어지며 저점을 찍자 개인은 다시 순매도로 돌아섰다. 개인 투자자는 이듬해 3월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총 8400억원어치를 팔았다. 같은 기간 외국인은 저가매수에 나서 1조8000억원어치를 사들였고, 전쟁이 시작되자 차익 실현 매물을 던졌다.

전쟁이나 테러 발발 직후 개인 순매수가 강하게 나타난 기간 동안, 개인이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은 시가총액 1위의 삼성전자였다. 큰 지정학적 위기를 맞닥뜨린 개인 투자자들은 코스피지수가 저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시총 비중이 높은 1위 종목을 대거 사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당시 나타난 개인과 외국인의 엇갈린 선택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임박한 현재도 반복되고 있다. 이달 18일부터 23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개인의 순매수액은 총 1조원이 넘었다. 삼성전자에 4000억원이 몰렸다. 반면 외국인은 시장에서 총 7000억원어치를 팔았다.

그래픽=이은현

◇ “러·우크라 전쟁 장기화 가능성…섣부른 순매수 위험”

이처럼 사태 발발 직후 개인은 매수, 외국인은 매도에 나서는 것은 지정학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된 현상이다.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개인 투자자는 한 명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성향이 모두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이 같이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진 직후 순매수액이 대폭 늘었다는 것은 ‘대포 소리가 들릴 때 사라’는 주식시장의 격언과 궤를 같이 한다”고 말했다.

반면 외국인은 지정학적 위기 앞에서 현금 확보를 위해 신흥국 주식을 정리하는 경향이 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상무)는 “외국인과 국내 기관은 우선 유동성을 확보하고 몸을 사렸다가 리스크가 조금 완화한 시점이 되면 바텀피싱(최저가 매수)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며 “기관이 목표한 밸류에이션과 갭이 크게 벌어지면 기계적 매수를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서방 국가들의 갈등 국면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증시 전문가들은 개인 투자자들이 섣부른 매수에 나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윤 본부장은 “한국은 글로벌 경기가 좋을 때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인데, 우크라이나 사태로 산업 전반의 원가 상승 부담이 가중되면 경기가 악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다”며 주식 매수 확대에 회의적 입장을 나타냈다.

정 상무도 “지금 주식시장을 억누르는 가장 큰 요소는 인플레이션과 통화 정책”이라며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3·5월 회의에서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내릴 예정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리스크와 별개로 증시가 하방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7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에서 해안 경비대를 방문해 무기를 둘러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기가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세간의 우려와 달리 미국과 러시아가 주축이 된 ‘냉전’이나 ‘세계대전’으로 번질 확률은 낮으나, 갈등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금융 시장에 장기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현 하버드대 페어뱅크중국연구소 방문학자는 “미국은 우크라이나 때문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훼손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또 “만약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러시아 은행들이 미국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중국의 금융망으로 우회한다면, 중국은 물론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도 여파가 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도 “대포 소리 한번으로 끝난다면 상관 없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는 순간 경기가 위축되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진행될 여지가 있는지 주시해야 한다”며 “크림반도 위쪽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 곡물 및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시장 충격이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