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자금이 대거 풀리면서 스타트업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창업 초기 단계의 시드(seed)나 프리A(pre-A) 단계부터 수백억원의 뭉칫돈을 투자 받는 기업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픽=이은현

2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설립된 지 11개월 된 지식재산권(IP) 스타트업 콘텐츠테크놀로지스가 최근 170억원 규모의 프리A라운드 투자를 유치했다. 앞서 시드 단계에서 투자 받은 32억원까지 더하면 누적 투자금이 200억원을 넘는다.

스타트업·벤처 투자는 일반적으로 시리즈A~E, 프리IPO 등으로 나뉜다. 시리즈A 이전 단계는 시드, 프리A로 구분된다. 보통 시드 투자는 창업 후 첫 투자를 의미한다. 창업 팀만 꾸려졌을 뿐 아이템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프리A나 A라운드는 사업 아이템을 위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단계의 투자다. 가설이 일차적으로 검증된 단계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시리즈B는 검증된 가설을 토대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단계에 이뤄지는 투자다.

보통 시드나 프리A 단계의 투자금은 100억원을 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상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십억원 수준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시드나 프리A 단계에서도 수백억원이 모이는 사례가 이따금 등장하고 있다.

체커는 지난해 12월 시드 단계에서 210억원을 투자 받았다. 이 회사는 기업이 사업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 관리한다. 야놀자와 카카오페이, 카카오엔터프라이즈, 당근마켓 등 유명 업체들과 거래하고 있다.

투자에 참여한 뮤렉스파트너스 관계자는 “체커의 경우 본사가 미국에 있는데, 미국에서는 100억원 이상의 시드 투자가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설계하는 리벨리온은 작년 7월 145억원 규모의 프리A 투자를 유치했다. 2020년 11월 시드 단계에서 55억원을 투자 받은 지 약 반년 만의 일이었다. 이 회사의 박성현 대표이사는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모건스탠리와 인텔,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스페이스X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같은 달 모바일 커머스 회사 RXC도 200억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지했다. 지난해 4월 설립된 후 3개월 만에 첫 투자를 받은 것이다. 유한익 전 티몬 이사회 의장이 설립한 스타트업으로, 아모레퍼시픽, 매일유업, 에프앤에프 등 전략적투자자(SI)들이 투자에 참여한 것으로 특히 화제가 된 바 있다.

한 VC 관계자는 “과거에는 100억원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주요 대형 투자사를 반드시 찾아가야만 했으나, 지금은 중소형 VC 한두곳만으로도 목표 금액을 금세 채운다”고 전했다. 또 다른 VC 심사역은 “요즘은 10억원대 투자 건으로는 어디에 홍보하기도 민망해, 투자금을 아예 비공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손민균

스타트업의 몸값 상승은 투자 시장의 넘치는 유동성에 기인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결성된 벤처 펀드의 규모는 9조2171억원에 달했다. 전년(6조8808억원) 대비 34% 늘어난 규모다. 결성된 펀드 수도 404개로 전년(206개)보다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결성액이 큰 대형 펀드도 많아졌다. 지난해 1000억원 이상의 벤처 펀드가 21개 결성됐는데, 이는 2019년(6개)보다 3배 이상 많은 규모다. 금융 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2~3년 전 대형사에서 결성 가능했던 펀드 규모와 현재 중형사에서 결성하는 펀드 규모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스타트업·벤처의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주가 수준)이 급등하는 데 대해 VC 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 한 VC 대표이사는 “펀드 출자자(LP)들도 스타트업의 몸값 급등에 대해 많이 걱정하는데, 솔직히 회사들의 기업가치가 자본시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오른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향후 몇 년 간 VC들의 투자 성적은 저조할 가능성이 크다. 벤처 투자 업계에서는 와인처럼 결성 연도에 ‘빈티지’를 붙여 펀드를 명명하는 관행이 있다. 예를 들어 2021년에 결성된 벤처 펀드라면 ‘2021년 빈티지’로 부른다. VC 심사역들은 ‘2015~2017년 빈티지’의 수익률이 높을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2020~2021년 빈티지’는 부진한 성적을 낼 것으로 우려한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최근 설립된 스타트업들이 질적으로 뛰어나다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한 VC 관계자는 “3~4년 전과 달리 요즘 창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지 조언해주고 가이드해줄 멘토가 많다”며 “투자를 하다보면 실제로 창업자들이 회사를 키워나가는 속도가 몇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