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기술 성장주 선호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한 달 들어서는 특히 성장주의 대표 주자격인 전기차 업체 테슬라 주식의 매수를 대폭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금리 상승기에는 성장주의 매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이나 기준금리 상승을 앞둔 상황에서는 성장주 매수를 줄이고 금융주를 사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현재 금융 시장을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이 증권 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금이 오히려 성장주 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이라고 인식하는 투자자가 많다는 얘기다.
1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국내 투자자들은 테슬라 주식을 7억1555만달러(8440억원) 순매수한 것으로 집계됐다. 엔비디아(4억4445만달러), 리비안(2억6026만달러), 메타(2억4743만달러)도 많이 사들였다.
국내 투자자들은 나스닥100 지수의 상승을 1배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 ‘INVESCO QQQ TRUST SRS 1 ETF’와 2배 추종하는 ‘PROSHARES ULTRA QQQ ETF’도 각각 8289만달러(978억원), 4248만달러(501억원) 순매수했다.
보통 기술 성장주는 채권 금리 상승기에 투자 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성장주는 미래의 성장성을 근거로 주가가 오르는데, 금리가 오르면 비용이 많이 들어 미래 현금 흐름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초 채권 금리가 급등하며 성장주가 부진한 흐름을 나타내기도 했다.
양주원 미래에셋증권 해외채권 트레이딩팀장은 “1월에는 주식에 투자금이 대거 몰리는 경향이 있는데, 올 초에는 특히 성장주 수요가 크게 늘었다”며 “이처럼 성장주를 많이 사둔 상태에서 채권 금리가 급등하자 주식 매도도 더 많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올해 1월 초 0.8910%까지 내렸던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3월 말 1.745%까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 기간 테슬라 주가는 880달러에서 600달러대 초반까지 내렸다. 애플 주가는 1월 말 143달러까지 올랐다 3월 말 110달러대로 하락했으며, 아마존 주가는 2월 초 3380달러에서 3월 말 3055달러까지 떨어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연일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과 기준금리의 조기 인상 의지를 피력하는 현 상황도 기술 성장주에 불리한 환경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인플레이션 압력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며 테이퍼링을 가속화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연준은 현재 매달 1200억달러 규모의 국채와 주택담보증권(MBS)을 매입하고 있는데, 이 규모를 11월에는 1050억달러로, 12월에는 900억달러로 줄이기로 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이 속도로 자산 매입을 줄여나가면 내년 6월에는 테이퍼링이 종료될 것이라고 예상해왔다. 그런데 만약 파월 의장의 말대로 테이퍼링 속도를 높인다면, 연준은 보다 빠른 속도로 다음 단계인 기준 금리 인상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도 투자자들의 기술 성장주 선호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성장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강한 신뢰 때문이다. 오현석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밸류에이션이 높은 성장주인데 현재도 계속 30~40%의 성장률을 나타내는 기업이라면, 금리가 올라도 주가 할인 폭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문남중 대신증권 연구원도 “미국 증시의 변동성이 크다 보니 당장 투자 수익을 내려는 심리보다는 향후 미국 경제를 견인할 전기차, 우주, 메타버스(가상 세계) 등에 관심을 갖고 투자하려는 심리가 더 큰 것 같다”고 분석했다.
테이퍼링과 내년 기준 금리 인상이 채권 금리 추가 상승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말 연준이 실질금리를 낮게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상황에서 긴축 정책에 대한 우려가 나오자, 텀 프리미엄(장기 채권을 보유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보상하는 수익률)이 오르고 채권 금리가 급등했다”며 “이미 채권 금리가 많이 상승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추가 상승세를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 연구원은 또 연준이 인플레이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채권 금리가 급등할 확률이 낮다고 내다봤다. 그는 “경기 개선이 지속되고 연준이 인플레이션 상승을 적당히 용인해준다면 채권 금리가 계속 오르겠지만, 내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연장될 것이라는 우려가 큰 데다 연준도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겠다고 밝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채권은 만기에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낮아지면 만기에 받을 돈의 가치가 오른다. 투자자들은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채권을 사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시장에 풀린 채권의 양이 감소하면, 채권 가격은 오르고 반대로 금리는 낮아진다.
김 연구원은 “해외 주식을 사기 위해서는 환전 수수료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이왕이면 기대 수익률이 높은 주식을 사려는 심리가 강하다”며 “미국의 대형 기술 성장주가 그동안 안정적인 성과를 보여온 만큼 투자자들이 내년에도 매수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