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신규 상장 기업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정정 공시 요구가 잇따르는 가운데, 이들 기업이 공모가를 하향 조정하는 과정에서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주가 수준)을 오히려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밸류에이션을 상향 조정하는 한편 높은 주가 할인율을 적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공모 가격을 낮춘 것이다.
증시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공모가 조정 방식이 기업 가치에 대한 회사의 자신감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금감원의 입맛에 맞게 공모가를 낮추되 기업 가치는 높게 유지함으로써, 투자자들에게 회사 펀더멘탈(체력)에 대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는 10월 유가증권시장 입성을 앞둔 카카오페이는 당초 희망 공모가 범위(밴드)를 6만3000~9만6000원으로 제시했으나, 지난달 31일 6만~9만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7월 16일 금감원에서 정정 신고서 제출을 요구받은 지 한 달 반만이다.
당초 증권 업계 일각에서는 카카오페이가 비교 기업을 밸류에이션이 낮은 회사들로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기존 비교 기업(페이팔·스퀘어·패그세구로) 중 페이팔의 밸류에이션이 지나치게 높았던 만큼, 적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비교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 카카오페이는 3개 비교 기업의 적용 성장률 조정 기업 가치 대비 매출액(EV/SALES) 평균치(44.7배)를 낸 뒤 자사에 적용해, 적정 시가총액을 16조6000억원으로 평가했다. EV/SALES를 통한 시가총액 산정은 매출액 성장률을 토대로 계산하는 방식으로 주로 적자 기업에서 많이 도입한다. 카카오페이의 경우, 적용 성장률 조정 EV/SALES가 82배에 달하는 페이팔이 전체 평균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카카오페이가 새로 선정한 비교 기업들의 평균 밸류에이션 멀티플(배수)은 45배로 오히려 높아졌다. 밸류에이션이 가장 높은 페이팔을 제외했지만, 적용 성장률 조정 EV/SALES가 각각 67배, 29배에 달하는 스톤과 업스타트홀딩스를 새 비교 기업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카카오페이는 이렇게 구한 밸류에이션 평균치를 자사 실적에 대입해 적정 시가총액을 약 18조원으로 산정했다.
카카오페이는 그 대신 주가 할인율을 높게 적용해 공모가를 낮췄다. 기존 할인율이 21.51~48.49%에 그쳤지만, 새 증권신고서에서는 할인율을 31.28~54.19%로 올린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모가 밴드를 소폭 낮출 수 있었다.
지난달 상장한 게임 ‘배틀그라운드’ 개발사 크래프톤 역시 밸류에이션의 하향 조정 없이 공모가를 내렸다. 크래프톤은 카카오페이와 마찬가지로 금감원의 요구에 지난 7월 공모가 밴드를 45만8000~55만7000원에서 40만~49만8000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크래프톤은 당초 월트디즈니·넷이즈·블리자드·테이크투인터랙티브·워너뮤직그룹·엔씨소프트·넷마블 등을 비교 기업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이들의 올해 1분기 기준 평균 주가수익비율(PER) 45.2배를 구한 뒤 자사 실적에 대입했다. 앞서 증시에 입성한 카카오게임즈와 펄어비스 등 게임 업체들이 대체로 PER 35배를 적용한 만큼, 크래프톤의 기업 가치가 상당히 고평가됐다는 평가가 많이 나왔다.
당시 크래프톤이 선정했던 비교 기업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된 회사는 월드디즈니였다. 게임 업체인 크래프톤과 사업 모델의 유사성이 떨어지는데다, PER이 89배에 육박해 밸류에이션의 평균치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증권 업계의 한 전문가는 “월트디즈니의 경우 디즈니랜드가 영업을 못하게 되며 순이익이 급감해, 일시적으로 PER이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크래프톤은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한 듯 비교 기업을 국내 게임 회사로 한정해 엔씨소프트, 넷마블, 카카오게임즈, 펄어비스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1분기 기준 평균 PER은 47.2배로 기존 대비 오히려 높아졌다. 엔씨소프트와 넷마블, 카카오게임즈의 PER을 50배 안팎으로 산정하는 바람에 평균치가 높게 형성된 것이다. 당시 엔씨소프트는 1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하는 바람에 PER이 일시적으로 비정상적인 수준까지 높아진 상태였다.
크래프톤은 그 대신 연간 지배주주 순이익을 줄이는 방식으로 공모가를 낮췄다. 기존에는 올해 1분기 지배주주 순이익에 단순히 4를 곱해 연간 순이익을 구했다면, 바뀐 증권신고서에서는 지난해 순이익과 올해 순이익의 평균치를 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계산식에 들어가는 연간 지배주주 순이익을 7760억원에서 6662억원으로 대폭 줄였으며, 평가 시가총액을 기존 35조원에서 29조원으로 낮출 수 있었다.
코로나19 진단 키트를 만드는 SD바이오센서의 경우, 평균 PER은 소폭 낮추는 데 그치는 한편 주가 할인율을 대폭 높였다. 기존 비교 기업들의 평균 PER은 19배였으며 새로 구한 평균 PER은 15배였다. 주가 할인율을 기존 24.2~41.1%에서 40.7~48.7%로 높이는 방법으로 공모가 밴드를 6만6000~8만5000원에서 4만5000~5만2000원으로 내릴 수 있었다.
공모가의 하향 조정 압박을 받는 기업들이 밸류에이션보다는 주가 할인율이나 다른 데이터를 수정하는 것에 대해, 증시 전문가들은 ‘조삼모사와 같은 전략’이라고 평가한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만약 밸류에이션 멀티플을 지나치게 낮춰 공모가를 조정하면, 투자자들이 회사의 기업 가치나 성장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원래 기업 가치는 높지만 많이 양보해 공모가만 깎아 줬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IB 관계자는 “금감원 입장에서는 투자자들이 지나치게 높은 공모가에 투자했다 손실을 보는 것을 방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 최종 공모가만 낮아진다면 중간 과정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안다”며 “이 때문에 기업 가치는 그대로 두거나 오히려 높이고 할인 폭을 늘리는 것이 가능한 구조”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