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국민 검객’ 올하 하를란이 파리 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땄다. 지난해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러시아 선수를 만나 악수를 거부하며 실격 처리된 지 1년 만이다.

하를란은 30일(한국시각) 여자 펜싱 사브르 동메달 결정전에서 접전 끝에 우리나라의 최세빈(전남도청)을 15-14로 꺾었다.

(파리(프랑스)=뉴스1) 박정호 기자 = 우크라이나의 올하 하를란 선수가 30일(한국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여자 사브르 개인 동메달 결정전에서 대한민국 펜싱 대표팀 최세빈 선수와 접전 끝에 승리, 전쟁 중인 조국에 첫 메달을 안긴 뒤 관중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뉴스1

이날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난 하를란은 “정말, 너무나 소중하다. 그 사태(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리가 딴 첫 번째 메달이다. 금메달이랑 같은 거다. 아니, 금메달보다도 값진 것 같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하를란의 동메달은 2022년 2월 러시아가 영토를 침공한 이후 우크라이나가 치른 첫 번째 올림픽에서 거둔 첫 번째 메달이다. 우크라이나는 2년 5개월이 넘은 지금까지도 러시아와 전쟁 중이다.

이날 경기에서 하를란은 15점째를 낸 후 감격에 차 오열했다. 무릎을 꿇더니 잠시 손으로 입을 가렸고,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진 마스크를 벗은 뒤 입을 맞췄다.

하를란은 2008년 베이징,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단체전에서 금, 은메달을 딴 우크라이나의 ‘국민 검객’이다. 2012년 런던과 2016년 리우 올림픽 개인전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를란은 지난해 ‘악수 거부’ 사건을 계기로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지난해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 64강전에서 러시아 출신 선수인 안나 스미르노바를 15-7로 물리쳤다.

경기 종료 후 마주 선 스미르노바가 다가가 악수하려 했으나 하를란은 자신의 검을 내민 채 거리를 뒀고, 악수는 하지 않은 채 경기장을 벗어났다. 당시 규정상 의무로 명시된 악수를 하지 않은 하를란은 실격당했다.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 실격으로 파리 올림픽 출전에 필요한 세계랭킹 포인트를 딸 기회가 사라진 하를란에게 올림픽 출전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의 올하 하를란 선수가 30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여자 사브르 개인 동메달 결정전에서 대한민국 펜싱 대표팀 최세빈 선수와 접전 끝에 승리하며 전쟁 중인 조국에 첫 메달을 안긴 뒤 감격해하고 있다. / 뉴스1

경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하를란은 “(이번 동메달은) 정말 특별하다. 믿을 수가 없다”며 “조국을 위한 메달이고,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메달”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기 오지 못한 선수들, 러시아에 의해 죽은 선수들을 위한 메달”이라며 “여기로 온 선수들에게는 참 좋은 출발로 느껴질 거다. 조국이 전쟁 중인 가운데 (대회에) 출전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경기 직후 마스크와 피스트에 입을 맞춘 순간을 돌아보며 “이건 내가 따낸 5번째 메달이다. 그저 내가 해냈다는 생각에 감사했던 것뿐”이라고 웃었다.

시상식을 마친 후 공식 기자회견에 참여한 하를란은 여기서도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하를란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과 관련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경 쓰고 있다. 그건 힘든 일”이라며 “우리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다 고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메달이 조국에 기쁨, 희망을 가져다주길 바란다”며 “우크라이나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스포츠가 아니라 실제 전쟁에서 자국의 선전을 응원하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하를란의 발언이 ‘정치적 표현’의 범주에 들지는 지켜볼 대목이다. IOC 헌장 50조는 시위나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동을 올림픽 경기장과 시설 등에서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스포츠의 정치 중립을 강조하는 조항이다.

하를란은 이번 대회에서 연인인 루이지 사멜레와 동시에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남자 사브르 선수인 사멜레는 지난 28일 금메달리스트 오상욱에게 패해 개인전 결승행이 좌절됐다. 이후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집트의 간판인 지아드 엘시시를 꺾고 시상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