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인제도는? 문어발식 재벌 확장 막으려는 한국식 규제
총수 경영 벗어난 IT기업 등장에 "시대 뒤떨어졌다" 비판
전문가들 "변화한 기업환경에 맞춰 사익편취 규제 대상 정해야"

미국 국적인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을 그룹 총수 격인 동일인으로 지정할지 여부를 놓고 공정거래위원회가 고심에 빠진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동일인 제도’를 손봐야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과거 한국식 총수 경영의 폐단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한 규제를 IT기업 등 신(新)산업에 적용하는 것이 기업의 성장을 옥죌 수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공정위의 고민은 외국인을 그룹 총수로 지정한 사례가 없다는 이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변화하는 기업환경에 맞춰 공정위가 기업집단에 대한 지배구조규제를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에 논의의 촛점이 맞춰져 있다. 전문가들은 공정위가 기업집단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로 설정해야한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실질적으로 쿠팡이라는 기업집단의 경영활동을 지배하는 김범석 의장을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그룹 총수’ 규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특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정위가 총수 일가가 순환 출자 등으로 그룹을 지배하며 경영권의 승계한 기존 재벌들을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유니콘 기업을 통제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공정위로서는 경제구조 변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제도개선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성경제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정책과장이 지난해 2020년 공시대상기업집단 내부거래 현황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재벌 견제 위한 한국식 규제…"시대 뒤떨어졌다" 비판

25일 복수의 경제부처 관계자에 따르면, 공정위는 다음달 1일 발표할 공시 대상 기업집단 선정 결과에 쿠팡의 김범석 이사회 의장을 그룹 총수에 해당되는 동일인으로 지정할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부터 그룹 회장직에 취임한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은 동일인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공정위가 주시하는 대기업집단에 들어가면 순환출자, 일감몰아주기, 지주회사 등 각종 규제의 대상이 되고 관련 사항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또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배우자나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등과의 거래가 모두 공시 대상이 돼 집중감시를 받는다.

대기업규제 및 동일인 제도는 1987년부터 시행됐다. 개발연대 당시 정부의 전폭 지원으로 성장한 소수의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걸 억제하기 위해 나온 한국식 규제였다. 계열사 간 순환출자와 상호출자 등을 통해 소수 지분을 갖고있는 총수 일가가 대기업 집단을 지배하는 ‘한국식 재벌체제’를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게 동일인 제도였던 것이다. 대기업 총수 일가가 다수의 계열회사를 지배하고 친인척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걸 막겠다는 명분이 강했다. 공정위는 동일인을 설정할 때 ‘실질적 지배력’을 판단 기준으로 보고있다.

공정위 내부에서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실질적 지배력 때문이다. 김 의장은 쿠팡의 모기업인 쿠팡INC의 지분 10.2%를 보유한 4대 주주이지만, 일반주식의 29배에 달하는 차등의결권을 적용받아 전체 의결권의 76.7%를 행사하고 있다. 지분 요건만 놓고보면 동일인에 지정되지 않을 수 있지만, 주요 임원에 대한 인사권 행사, 기업집단 내 조직 변경, 사업구조 변화 등에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관점에서는 지정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쿠팡을 포함해 2010년대에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된 카카오(035720), 네이버, 넷마블(251270)등 정보기술(IT)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전통적인 재벌 대기업과 동일 선상으로 보기 힘들다는 반론도 있다. 이들 기업 진단에는 재벌식 순환·상호출자가 없고, 혼맥으로 얽힌 친족 경영도 거의 없다. 또 2세, 3세 등으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 체제로 기업이 운영되는 경향이 강하다.

◇스타트업 성장에 ‘족쇄’…외자유치 장애물

스타트업계에서는 쿠팡이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으로부터 출자를 받아 자본금을 확충하는 유니콘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총수 일가가 소수 자본으로 순환·상호 출자를 통해 형성된 가공자본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구조와 다르다는 얘기다.

업계에서는 쿠팡이나 토스, 우아한형제들(배민)처럼 글로벌 자본의 투자를 받아서 성장한 기업들에게는 동일인 제도가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니콘기업의 창업자는 기업 내부에서는 경영권 등 지배력을 행사하지만, 자본을 투자하는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통제받은 위치에 있다는 측면에서다. 기업의 활동 무대가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시장을 국내로 좁힌 ‘경제력 집중’ 개념으로 규제하는 것이 실효성과 효율성 모두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동일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한 점도 문제다. 지금은 총수의 직간접 지분율과 경영 활동에서 드러나는 영향력을 근거로 공정위가 ‘실질적 지배’ 여부를 심사해 지정한다. 사실상 공정위의 자의적 판단이 동일인 지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동일인 지정 기준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나온다.

네이버가 대표적이다. 네이버는 2017년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지분이 4%에 불과한 점을 근거로 총수 없는 기업집단 지정을 요청했지만, 공정위로부터 묵살당했다. 공정위가 "이해진 GIO가 네이버를 사실상 지배한다"고 임의로 판단하면서다. 쿠팡의 김범석 이사회 의장도 과거의 총수와 같이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IT기업 문어발식 사업확장 ‘주목’…규제 방식 개선에는 공감대

그렇지만, 최근 IT대기업들이 융·복합 서비스를 내세우면서 사업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고 있는 추세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카카오는 사업 영역을 모빌리티로 확장하면서 택시 회사들을 대거 자회사로 편입하고 있고, 네이버는 비대면 쇼핑과 중소상공인에 대한 파이낸싱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총수 1인이 사업영역 확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은 기존 재벌 대기업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동일인 지정 제도를 유지하되, 규제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앞서 국회입법조사처도 지난 2019년 ‘공정거래법상 동일인 지정제도의 현황과 개선과제’ 보고서를 내고 '동일인 지정제도'가 우리나라 기업집단의 특수성 때문에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일인 판단기준이 불명확하고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내부 심사에 의존하고 있어 법령으로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등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한 바 있다.

이황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총수 개인의 사익편취를 막는 데 집중하기보다 변화한 기업경영 환경에 맞춰 실제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업집단의 실체를 인정하는 쪽으로 법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족 관계나 경영 관행도 모두 변화했기 때문에 유연하고 세부적인 기준을 정해 동일인 제도를 개선해야 악용 사례를 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공정위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동일인 지정 제도는 세법 등 여러 별도 법제가 엮인 복잡한 문제인 탓에 수년 째 제자리 걸음이었다. 앞서 2년전에는 김상조 전 위원장이 당시 한진그룹 조원태 회장 동일인 지정을 두고 벌어진 논란을 두고 "동일인(총수) 지정을 현실과 좀 더 부합하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때문에 이번 논란을 계기로 공정위가 본격적인 동일인제도 개선에 나설 가능성도 점쳐진다.

공정거래법에 정통한 한 로펌 관계자는 "기업 환경이 변화한만큼 경제력 집중과 사익편취를 총수 지정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그룹의 핵심 기업과 그 경영진, 경영진의 친족 등 규제 대상을 유연화해야 한다"며 "실제 상황에 맞는 규제를 위해 공정위가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