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석유를 선언한 정유업계가 화석연료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해 사업 다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유사들은 앞으로 기름만 팔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보고 기존 정유 사업 비중을 낮추고 수익성이 높은 석유화학 사업을 확대하는 한편, 미래 먹거리로 삼은 수소 사업에 앞다퉈 진출하고 있다.

국내의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석유시대 종말’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세계적인 탄소중립 흐름에 발맞춰 석유 수요가 점진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선제 대응 차원에서 비(非)정유 사업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에쓰오일 울산공장 전경

◇ ‘석유화학의 쌀’ 에틸렌 증설에 조 단위 투자

22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들은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사업에 조(兆) 단위의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GS칼텍스는 2조7000억원을 들여 전남 여수공장 인근에 올레핀 생산시설(MFC)을 건설 중이다.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유분인 에틸렌을 연간 70만톤(t), 폴리에틸렌 50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이 공장은 이르면 올 상반기 가동이 목표다.

그간 정유사들은 원유 정제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를 석유화학사에 팔았지만, 앞으로 직접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을 생산한다는 구상이다. 에틸렌은 플라스틱, 비닐봉지, 건축자재, 페인트, 자동차 내장재, 합성고무 등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제품들의 기초 원료다. 나프타를 원료로 쓰는 석유화학사의 나프타분해시설(NCC)과 달리 MFC는 나프타 뿐만 아니라 액화석유가스(LPG), 부생가스도 원료로 사용할 수 있어 생산성이 더 높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각국의 친환경 정책에 따라 향후 수요 감소가 예고된 석유와 달리 전기차 배터리, 가전제품, 의류 등 화학원료를 쓰는 제품의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정유사들이 화학사업 비중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4월 톤당 평균 40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던 에틸렌 가격은 올 들어 광범위한 코로나 백신 접종과 경기 회복에 힘입어 수요가 회복되면서 지난달 기준 톤당 1201달러까지 올랐다.

에쓰오일은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지연된 7조원 규모의 석유화학 확대 사업인 ‘샤힌 프로젝트’를 올 하반기에 재개한다. ‘샤힌 프로젝트’는 울산공장에 스팀크래커와 올레핀 다운스트림 설비를 구축하는 사업으로, 나프타와 부생가스를 사용해 연 150만톤 규모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게 핵심이다. 에쓰오일은 에틸렌 증설을 통해 2030년까지 석유화학 비중을 생산물량 기준 현재 12%에서 25% 수준까지 높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대오일뱅크도 창사 이래 최대 투자금액인 3조원을 중질유석유화학시설(HPC) 구축에 투자했다. HPC는 원유 정제과정에서 나오는 중질유 등을 활용해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설비다. 현대오일뱅크가 롯데케미칼(011170)과 세운 합작회사인 현대케미칼을 통해 충남 서산 석유화학단지에 건설 중인 프로젝트다. 공장은 현재 약 90% 완료됐으며, 오는 8월부터 연간 에틸렌 85만톤, 프로필렌 50만톤 등을 생산하게 된다.

회사 관계자는 "HPC를 통해 배터리 분리막 소재, 태양광 패널 소재 생산이 가능하다"면서 "HPC를 통해 연 5000억원의 영업이익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대표는 "현재 85%인 정유사업 매출 비중을 2030년까지 40%대로 줄일 계획" 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이 투자한 미국 수소기업 플러그파워의 탱크로리

◇ 정유공장 부산물 ‘수소’ 미래 먹거리로 선점

정유사들은 친환경 사업 강화 차원에서 수소 사업에도 시동을 걸고 있다. 수소가 정유·석유화학 공정 부산물로 나온다는 이점을 활용해 수소 생산부터 운송, 판매까지 아우르는 수소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오일뱅크는 미국 수소기업 에어프로덕츠와 손잡고 원유 부산물과 직도입 천연가스로 수소를 생산하기로 했다. 2025년까지 블루수소 10만톤을 생산하고 2030년까지 전국에 180여개 수소 충전소를 구축하는 게 목표다. SK이노베이션(096770)도 자회사인 SK인천석유화학의 석유화학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부생수소를 SK E&S에 공급하기로 했다. SK E&S는 이렇게 받은 부생수소를 고순도로 정제해 액체로 가공한 뒤 액화수소를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 유통하게 된다.

에쓰오일 역시 최근 수소의 생산부터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수소산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연료전지 기반으로 청정 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하는 에프씨아이(FCI) 지분 20%를 인수했다. 이와 함께 에쓰오일은 대주주인 사우디 아람코와 그린수소, 그린암모니아를 활용한 사업 및 액화수소 생산·유통사업 등을 검토 중이다.

후세인 알 카타니 에쓰오일 최고경영자(CEO)는 "수소경제 전반에 대한 투자를 시작해 정부의 탄소저감 노력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