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순한맛 기호 분명해지고 식감 중시하면서
풋고추 대세가 '녹광'에서 '청양·오이맛'으로 이동
2월 도매가 '녹광'은 올랐지만 '청양'은 오히려 하락

한국은행은 지난 24일 발표한 2021년 2월 생산자물가지수 보도자료에서 풋고추 가격이 전월(1월)에 비해 127.3% 올랐다고 밝혔다. 이는 생산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상품과 서비스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란, 대파 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는 상황이라 밥상 차리는 사람들 입에서는 "풋고추, 너마저!"라는 한탄이 나왔다.

그런데 가락시장 도매가격 기준 청양고추 10kg당 2월 한달간 평균가격은 지난해 11만3300원에서 올해 9만5500원으로 15.7% 하락했다. 전월대비 상승률은 48.1% 오르는데 그쳤다. 생산이 감소하는 겨울철 기준으로는 예년 수준의 상승폭이다. 지난해 2월의 전월비 상승률은 55.8%였다.

한은 생산자물가 통계와 가락시장 도매가격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한은이 지난 2008년부터 생산자물가지수를 산출하기 위해 추가해 조사해온 ‘풋고추’ 품종이 10년 사이 신품종의 인기에 밀려 시장 점유율이 급감해 생긴 일이었다. 이 품종 이름은 ‘녹광고추’. 한국 밖에서는 ‘코리안 다크 그린 페퍼(Korean dark green pepper)’로도 불리는, 익으면서 빨갛게 변하는 재래종 고추다.

오이맛고추(아래쪽)와 녹광고추(위)

소비자들이 매운맛과 순한맛 등 기호를 분명히 하고 아삭거리는 식감등을 추구하면서, 재래종 녹광고추는 ‘중간 매운 맛’과 평균 수준에 그치는 식감으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됐다. 이에 농가들은 생산량을 줄였고, 결국 물가 지수를 구성하는 항목으로 있으면서도 ‘풋고추’ 대표선수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상황이 됐다.

결국 한은이 13년동안 풋고추 가격을 대표하는 품목을 바꾸지 않고 생산자물가 통계를 생산해 실제와 다른 통계치가 나온 것이다. 한은은 13년동안의 소비자 취향변화를 통계기준에 반영하지 않아, 중앙은행이 생산하는 통계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렸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가락시장 풋고추 반입량 및 거래단가 추이

26일 농림축산식품부·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가장 대중적인 풋고추 품종인 청양고추는 지난 2월 한달 평균가격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하락했다. 주산지인 영남권의 기상여건이 좋고 재배면적이 늘면서 출하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월 한달간 청양고추의 가락시장 도매가격 기준 10kg당 가격은 지난해 11만3300원에서 올해 9만5500원으로 15.7% 하락했다. 전월대비 상승률도 48.1%이었다. 이는 설 연휴가 밀린 점을 고려하더라도 예년 수준 상승폭이다. 지난해 2월의 전월비 상승률은 55.8%였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지난 24일 발표한 2021년 2월 생산자물가지수 보도자료에서 풋고추 가격이 전월(1월)에 비해 127.3% 급등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는 생산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상품과 서비스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이에 풋고추 가격이 계란, 대파에 이어 밥상 물가를 위협하는 주범처럼 거론되고 있다. 이는 풋고추가 7대 과채류의 하나에 들 정도로 한국에서 대중적 사랑을 받는 먹거리이기 때문이다.

농식품부와 한은의 풋고추 가격 상승률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했을까. 정답은 한은이 생산자물가지수를 산출할 때 반영하는 풋고추 품목에 있었다. 한은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집계하는 품목(중분류)명 ‘풋고추’에서 ‘청양고추’, ‘꽈리고추’를 제외한 품종(소분류)명 ‘풋고추’의 한달간 평균 도매가격을 사용한다.

풋고추라고 하면 붉은 고추(홍고추)나 말린 고추(건고추)와 대비해 녹색을 띄고 건조되지 않은 청양계 풋고추(청양고추), 오이맛고추, 녹광고추, 롱그린고추 등의 품종을 함께 떠올린다. 요즘에는 청양고추와 오이맛고추가 풋고추 생산·소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풋고추 반입 비중 추이

aT에 따르면, 품종명 ‘풋고추’는 ‘녹광고추’다. 별도 품종명으로 가격정보를 제공하는 청양고추, 꽈리고추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또 가격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오이고추나 롱그린고추, 청초 등 다른 일반풋고추도 품종명 ‘풋고추’에 포함되지 않는다.

녹광고추 등 일반풋고추는 주산지인 영남권에서 재배면적이 줄면서 2월 가격이 전년 대비 상승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 3월호에 따르면, 2월 한달간 일반풋고추의 가락시장 도매가격 기준 10kg당 가격은 지난해 7만7600원이었는데, 올해 11만1100원으로 전년대비 28.8% 상승했다.

문제는 이 녹광고추가 최근 수년 사이에 농가는 기르지 않고 소비자들은 찾지 않는 품종이란 점이다. 지난해 기준 서울가락도매시장에서 거래된 풋고추의 품종별 반입 비중을 보면 청양고추는 66%, 오이맛고추는 26%, 일반풋고추 8% 순이었다. 일반풋고추는 다시 녹광고추, 롱그린고추, 청초 등으로 세분화되는데 녹광고추의 반입 비중은 롱그린고추의 절반 수준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물가 기준을 한국은행이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품종별 점유율 변화는 일시적인 사건이 아닌 10년 가까이 이어진 추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20년 농업전망’에서 서울가락도매시장의 청과법인 3사의 내부자료를 인용해 2010년 청양 54.4%, 오이맛 1.5%, 일반(녹광 등) 44.1%였던 풋고추 품종별 반입 비중이 2019년 청양 58.0%, 오이맛 25.9%, 일반(녹광, 롱그린 등) 16.1%로 변화했다고 분석했다. 오이맛고추가 일반풋고추의 점유율을 추월한 시점은 2015년부터였다. 반입 비중이 줄어든 일반풋고추 내에서는 신품종인 롱그린고추가 녹광고추의 인기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였다. 롱그린고추는 2012년부터 반입이 시작돼 2017년 이후에는 녹광고추의 반입규모를 뛰어넘었다.

일반풋고추와 오이맛고추 반입비중 추이

이같은 추세 변화는 소비자들의 기호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중간 단계의 매운 맛(녹광)을 여러 용도로 쓰기보다는 요리에 따라 확실하게 맵거나(청양) 맵지 않은(오이맛) 맛을 골라 쓰게 됐다는 이야기다. 또 아삭함이나 껍질의 두께 같은 식감을 중시하게 된 점도 녹광고추보다 오이맛고추나 롱그린고추가 인기를 얻게된 배경이다.

한국은행 ‘국민계정’ 2008년 제3호에 따르면, 생산자물가지수는 2005년을 기준으로 개편돼 2008년 7월부터 공포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수요가 늘어난 ‘고추’라는 품목이 ‘건고추’와 ‘풋고추’로 분할돼 조사됐다. 12년 7개월째 ‘풋고추’라는 항목의 가격을 조사중인 셈인데, 출발 당시에는 녹광고추를 기준으로 삼아도 문제가 없었다. 녹광고추가 풋고추의 절반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0년도 들어 오이맛·롱그린고추 등 다양한 품종의 풋고추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청양고추를 포함시킬지 여부에 대해 계속 고민중"이라면서도 "기존 품목(녹광고추)이 현재의 기상여건이나 공급여건, 청양고추 시세 등에 연동되면서 가격의 방향성이 비슷해 있어서 일단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1월 한파로 고추의 생육이 늦어지면서 공급 측면에서 제약이 걸리고, 2020년 1월 24~27일이던 설 연휴가 올해 2월 11~14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설 대목 수요가 대거 2월로 밀리는 등의 이유는 품종과 관계없이 풋고추 가격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풋고추 항목을 구성하는 품종은 변경은 시급해 보인다. 풋고추 주산지인 영남권에서 녹광고추 등 일반풋고추 생산자가 청양고추 생산자로 품종을 바꾸면서 일반풋고추 수급과 청양고추 수급이 엇갈리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의 현 입장과 달리 두 품종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녹광고추를 포함한 일반풋고추는 주산지인 영남권에서 재배면적이 줄면서 출하량이 줄어 2월 가격이 전년 대비 상승했지만, 청양고추는 재배면적·출하량이 늘면서 가격이 오히려 하락했다.

이밖에 오히려 가격 변동이 심한 청양고추가 관리의 대상이 아니란 점도 문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청양고추 가격은 해마다 등락이 심하지만 녹광·롱그린 등 일반풋고추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