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미국의 그래픽 아티스트 슬라임선데이(Slimesunday·본명 마이크 패리셀라)는 디지털 회화 작품 한 점을 제작해 ‘국가 최후의 저항’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플랫폼에 업로드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에 일부 이미지를 덧씌워 제작한 이 작품은 최초 판매 가격이 40달러(약 4만5100원)에 불과했지만, 최근 세컨더리마켓(2차 시장)에서 1만3999달러(1579만원)에 판매됐다. 넉 달 만에 가격이 350배나 급등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왼쪽)와 이를 패러디한 슬라임선데이의 ‘국가 최후의 저항(The Last Stand of the Nation State)’(오른쪽).

슬라임선데이의 이 작품에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암호 화폐에 디지털 파일을 연결한 NFT(대체 불가능 토큰) 기술이 적용됐다.

기존 암호 화폐는 같은 값을 가진 다른 암호 화폐와 일대일로 교환할 수 있지만, NFT는 특정 파일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고유성과 희소성을 지닌다. 쉽게 말해, 평범한 동전에 그림을 새겨 넣어 기념주화로 만들면 희소가치가 높아져 가격이 비싸지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 이미지 파일에 NFT 기술 접목하자 780억원에 낙찰

최근 NFT 미술품 시장에서 단연 최고의 화제를 모은 인물은 미국의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Beeple·본명 마이크 윈켈만)이다.

비플의 ‘매일: 첫 5000일(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비플이 NFT 기술을 접목해 만든 이미지 파일 한 점은 지난 1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930만달러(약 780억원)에 낙찰됐다.

이에 질세라 경매 업체 소더비 역시 디지털 아티스트 팩(Pak)의 작품에 NFT 기술을 접목해 경매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 데미안 허스트 역시 자신의 작품에 NFT 기술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 수십억 경매가가 부담스럽다면 ‘NFT 거래소’ 활용

이처럼 NFT 미술품이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다는 소식이 잇달아 들려오고 있으나,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진입 장벽이 지나치게 높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들 미술품의 경매가가 수억원에서 수백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NFT 미술품에 투자하는 방법에는 고가의 경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플의 작품처럼 경매를 위해 단 한 점만 제작·판매하는 경우에는 낙찰가가 수십·수백억원까지 오르기 쉽지만, 작품 한 점을 여러 개의 판본으로 제작해 각기 다른 고유 번호를 매겨 판매하는 경우에는 비교적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다.

스티브 아오키의 ‘캐릭터X(CharacterX)’(왼쪽)와 할시의 ‘치과 공포증(Odontophobia)’(오른쪽) 속 한 장면. 두작품 모두 배경에 음악이나 소리가 깔린 짧은 동영상 파일이다.

‘니프티 게이트웨이’는 대표적인 NFT 거래소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여자친구이자 가수인 그라임스가 작품을 판매해 65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도 잘 알려진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에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작가들의 신작이 출시되는데, 이를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다. 일본계 미국인 디제이(DJ) 스티브 아오키와 가수 할시도 이곳에서 1000~2000달러대의 미술품을 판매했다.

디지털 미술품은 이미지나 짧은 동영상의 형태로 제작되며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연결돼 판매된다. 최초 판매가는 작가가 정한다. 구매를 원하는 이용자는 신작 발매 시간을 기다렸다가 선착순으로 구매를 신청하면 된다. 니프티 게이트웨이에서는 이러한 작가와 사용자 간 일차 시장을 가리켜 드랍(Drop)이라고 부른다.

◇ 희소성 떨어지는 ‘오픈에디션’ 사도 수백 배 차익

드랍을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에 작품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수량이 극히 한정돼 있기 때문에 구매가 쉽지 않다. 이 경우에 택할 수 있는 차선책이 ‘오픈에디션(Open edition)’이다.

오픈에디션이란 한정판 작품 판매 후 약 10분 동안 판본을 최대 9999개까지 발행하는 것을 뜻한다. 각 판본에는 고유 번호를 매겨 ‘정품’임을 인증한다. 비록 최초 발행된 한정판에 비해서는 희소성이 떨어지나, 이것을 사두면 향후 세컨더리마켓에서 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

비플의 ‘불 런(Bull Run)’(왼쪽)과 73번 에디션의 매매 이력. 한 사용자가 최초가 969달러에 작품을 사서 2500달러에 재판매했으며, 이를 산 사용자가 판매가를 85만달러로 올렸다.

앞서 언급한 ‘국가 최후의 저항’ 외에도 많은 작품이 세컨더리마켓에서 가격이 수십, 수백 배로 뛴 상태다. 비플의 작품 ‘불 런’ 오픈에디션은 총 271점이 발매됐는데, 그 중 한 점이 최근 세컨더리마켓에서 최초가보다 200배 높은 가격에 재판매됐다.

불 런 오픈에디션 중 또 다른 한 점은 지난해 말 969달러에 최초로 거래된 후 20분 만에 2500달러에 되팔리기도 했다. 이후 급등을 계속하던 그림 가격은 이달 12일 기준 85만달러에 매수자를 찾고 있다. 만약 이 작품이 85만달러에 판매된다면, 그림 가격은 넉 달 만에 877배 뛴 셈이 된다.

트레버 존스가 제작한 ‘비트코인 천사’는 오픈에디션이 무려 4157점이나 발매됐음에도 수요가 많다. 이 그림의 최초 가격은 777달러(약 87만원)에 불과했으나, 최근 오픈에디션 중 한 점이 3800달러(약 428만원)에 거래됐다.

트레버 존스가 제작한 ‘비트코인 천사(The Bitcoin Angel)’.

이처럼 인기 있는 작품들의 경우 세컨더리마켓에서 판매가가 매우 가파르게 급등하기 때문에 블록체인 시장에서 새로운 투자 수단이 될 수 있다. 어떤 작품이 향후 대중에게 인기 있을지 일찌감치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수백 배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금융 투자 업계에서는 이 같은 NFT 미술품 투자 활성화를 통해 미술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이 낮아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김용호 한양증권 연구원은 "예술품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하면 소유권의 분할 및 유동화가 가능해져, 예술 투자에 대한 진입 장벽이 낮아질 수 있다"며 "이는 궁극적으로 예술품이 대중적 대체투자 자산으로서 기능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