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알리바바의 '광군제(光棍節)' 행사에서 국내 화장품 회사들이 역대 최대 매출을 올렸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애경산업 등 대기업과 닥터자르트, AHC 등 중견 기업들이 작년 대비 60% 이상, 최대 300%가 넘는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매출 1억 위안을 넘긴 전체 브랜드 299개 중 한국 브랜드는 11개로 그중 8개가 화장품이었다.

서울 명동 상권의 화장품 로드샵 브랜드도 다시 살아나는 조짐이라고 한다. 중국 관광객 증가와 함께 대형 면세점과 로드샵의 화장품 매출이 동반상승 하고 있다. 좀더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한국 화장품(K-뷰티) 산업의 제2 전성기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몇년전 한국 화장품 산업이 승승장구하며 K-뷰티 바람을 일으킨 것은 전적으로 기업들이 이뤄낸 성과다. 최근 광군제 행사에서 나타난 부활 조짐 역시 기업들이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다. 그 과정에서 정부가 한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화장품 산업에 대해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홍남기 경제부총리로부터 주요 경제 현안에 대한 정례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특별히 화장품 산업 육성을 지시했다. 홍 부총리가 범정부 차원의 바이오 산업 육성 계획을 보고하자 대통령이 "화장품도 바이오 산업의 중요한 축"이라며 K-뷰티 산업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갑자기 화장품 산업을 거론한 배경이 뭘까. 다른 산업도 그렇지만 화장품 산업도 현안이 많다. 신제품 개발, 브랜드 이미지 고급화, 시장 다변화, 소비패턴의 변화 대응 등 과제가 산적해있다. 하지만 정부가 할 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 기업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화장품 산업 육성은 시대착오적 구호다.

그래서 대통령의 지시가 뜬금 없게 들린다. 주무 장관이 아닌 경제부총리에게 한 지시라는 점에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다. 다른 많은 현안을 놔두고 화장품 산업만 콕 집어 거론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거시경제 현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정작 할 말은 안하고 엉뚱한 이야기만 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경제 부총리의 정례 보고 다음 날 기획재정부가 공식 경기진단 보고서인 ‘그린북’에서 ‘부진’이라는 표현을 뺀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 동안 사용했던 ‘경기 부진’이라는 표현을 ‘성장 제약’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경제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는 대통령의 당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졌다. ‘반도체 업황 부진’이라는 설명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그 위에 ‘반도체 단가 인하’라고 쓴 스티커를 일일이 붙였다. 급하게 그린북을 수정하느라 ‘부진’ 표현을 다 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린다고 해서 ‘경기 부진’의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심형래씨가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는 "영구 없다"고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렇게 ‘봉숭아 학당’을 방불케 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청와대 대변인은 "곳간에 있는 작물을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리기 마련"이라며 재정 확장을 합리화했다. 비유라고 하지만 돈이 썩어나기 전에 빨리 써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전대미문의 궤변이다. ‘개그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억지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올 9월까지 누적 관리재정수지가 57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내년 적자 규모는 72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빚 내서 나라살림 꾸려가는 처지에 무슨 ‘작물’을 쌓아둔게 있다고 흰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다. 돈을 펑펑 쓰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사람들이 국민 세금을 꼭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재인 정부 임기 반환점을 지나면서 청와대와 여당이 온갖 자화자찬을 쏟아낸 것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정부는 시작부터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워 국가를 정상화했고, 정의 가치를 사회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고 했다. 여당은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지난 2년반을 평가했다.

조국 사태로 온나라가 시끄러웠을 때 인터넷에서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과정은 상관 없습니다. 결과는 내 마음대로 입니다’는 비판이 유행했다. ‘기회 평등, 과정 공정, 결과 정의’라는 대통령 취임사의 패러디다. 최소한 절반의 국민이 여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대통령의 귀에는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지고, 기업 실적 부진으로 세수가 줄어들고, 소득 분배가 사상 최악을 기록했는데도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기 알바 위주의 노인 일자리만 늘어나는 현실을 외면한채 "고용의 질이 개선되고 있다"고 우긴다. 경제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공격한다.

정부가 몰래 보고 있는 비밀통계 속의 대한민국과 현실 속의 대한민국이 서로 다른 나라인 모양이다. 그래서 "영구 없다"는 식의 허무 개그가 끝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웃기지도 않는 봉숭아 학당 놀이를 지켜봐야 하는지 국민들은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