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로 중국 비즈니스가 큰 타격을 입었고,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로 일본과의 사업도 어려움이 산적해가는데 이제는 미국 사업에까지 불똥이 튈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 인사는 "경제와 상관없는 정치적인 이슈로 우리 기업들이 골병이 들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에 대해 '우려와 실망'을 공개적으로 표시하는 등 전통적인 한·미 동맹에 균열 조짐이 보이자, 주요 대기업은 미국 내 법인 등을 통해 한·미 관계가 앞으로 경영 활동에 끼칠 영향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 분석 작업을 벌이고 있다. 기업들이 특히 긴장하는 것은 우리 경제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인 무역 의존도가 70%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 중 중국·미국·일본 3개국 비중은 수출·수입에서 각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 국가들은 '자국 이익'을 위해 억지 주장까지 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우리 기업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기업들은 정치로 촉발된 해외 이슈에다 국내에서는 주 52시간제 도입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각종 비용 상승, 영업이익 급감 등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개선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경기하강 우려가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일제히 투자를 줄이고 보유 현금을 늘리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기업 분석 사이트 재벌닷컴이 최근 자산 상위 10대 그룹 상장사 95곳의 반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의 올 상반기 현금 보유액(242조2000억원)은 지난해보다 18조4600억원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이 회사들의 영업이익은 32조원이 줄어 반 토막 수준이 됐다. 이익은 줄어드는데 현금 보유액이 증가하는 건 투자를 줄이고 단기 금융 상품 등을 늘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59개 대기업 집단의 상반기 투자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조원(23%) 이상 줄어들었다.

기업뿐 아니라 개인 자산도 금이나 달러 같은 안전자산으로 몰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국내 거주자들의 미 달러화 예금 잔액은 596억달러인데 이 중 개인 보유분이 21.3%인 127억달러(15조3600억원)에 달한다. 한은 관계자는 "통상 환율이 오르면 환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달러를 팔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최근엔 환율이 올라도 외화예금 규모가 오히려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팀장님, 지금 이 환율에 300만불 사주세요."

지난 30일 정오가 막 지날 무렵, 시중은행 PB(프라이빗뱅커) A팀장은 주거래 고객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예금만 수백억원에 이르는 이 고객은 며칠 전 환율이 1210원 밑으로 떨어지면 꼭 달러를 사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전날 1216.4원에 마감했던 환율이 이날 빠르게 떨어져 장중 1209원을 찍자, 달러 매입을 요청한 것이다. A팀장은 "환율이 1200원을 돌파한 이후 달러 매수 문의가 다소 잦아드는 듯하더니, 지소미아 파기 등 지정학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환율에 상관없이 일단 달러를 사놓겠다는 자산가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골드바 사려면 일주일 이상 대기

KB국민·신한·KEB하나·우리·NH농협 등 시중은행 5곳의 8월 말 기준 달러 예금 잔액은 약 367억달러로 작년 말 대비 소폭 줄었다.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나빠지면서 덩치 큰 달러 유입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달러 예금은 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업 실적 악화로 기업들의 외화 예금은 작년 말부터 줄고 있지만, 개인들은 꾸준히 돈을 넣고 있다"고 말했다.

연초 이후 품귀 현상을 빚고 있는 골드바의 경우, 대기 명단에 일주일 정도 이름을 올려놓아야 살 수 있다. 1㎏짜리 골드바 가격은 현재 6800만원으로 연초보다 28% 급등했다. KB국민은행 정성진 PB팀장은 "금값이 많이 올랐지만 물건만 나오면 사달라는 문의가 많다"고 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기준 국내 12개 '금 펀드' 설정액 총액이 최근 한 달간 358억원 늘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확산되며 금값이 가파르게 상승한 덕에 수익률은 고공 행진 중이다. 국내 금 펀드 평균 수익률은 최근 한 달 8.7%, 연초 이후 26.7%에 달했다.

안전자산을 찾아 헤매는 자산가들은 트레저리 본드(미 재무부 채권)나 캐나다 달러 예금 등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SC제일은행 김재은 이사는 "수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고객들도 예전 같으면 이익의 상당 부분을 투자에 쓰고 남는 돈을 은행에 가져왔는데, 지금은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러를 사달라고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중국·일본에 이어 미국마저…투자 줄이고 현금 쌓는 기업들

정치적 이슈와 이로 인한 불확실성에 흔들리는 기업들 역시 수세적인 경영에 나서고 있다. 사드 사태는 발생한 지 3년이 되도록 '진행형'이다. 우리 기업들은 중국의 경제 보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드 악몽'을 경험했다. 중국에서 롯데, 현대차 등 우리 기업이 입은 피해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시작된 일본의 수출 규제 때문에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우리 핵심 산업이 일본산 부품 공급 여부에 목을 매야 하는 사실상의 '볼모'가 돼 있다. 일본 불매운동이 번지면서 항공업계 전체가 직격탄을 맞아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항공편 3개 중 2개가 운항 중단이나 운항 편수를 축소했고, 국내 8개 항공사가 모두 2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항공업계에서는 "이 같은 사태가 연말까지 계속되면 특히 일본 등 단거리 노선에 집중했던 LCC(저비용 항공사) 중에는 망하는 곳이 생길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의 관계 악화 조짐까지 보여 기업들은 더 큰 위기감을 갖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우리나라 수출·수입 측면에서는 미국이 중국에 이어 2위이지만, 전 세계 시장에서 미국 시장이 갖는 중요성·상징성 등을 고려하면 중국·일본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며 "지난 6월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짧은 만남에 우리나라 대기업 오너들이 모두 달려간 것은 철저히 경제·사업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쌓고 있다. 지난해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만난 주요 대기업 총수들은 '3년간 180조원 투자'(삼성그룹), '5년간 23조원 투자'(현대차 그룹), '3년간 80조원 투자'(SK그룹) 등 앞다퉈 장밋빛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올 상반기 투자 실적은 암울했다. 기업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최근 59개 대기업 집단 353개사의 올 상반기 투자액을 조사한 결과, 삼성그룹은 지난해 15조5443억원에서 올해 9조2893억원으로 40.2%(6조2250억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SK와 LG도 각각 2조2260억원(21.1%), 2조1076억원(28.4%)씩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삼성그룹의 현금 보유액은 119조1000억원으로 13.2% 증가했다. SK그룹 역시 25조1900억원으로 지난해 22조원보다 14.5% 늘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기업들의 대내외 경영 환경이 어려워지는데 정치·외교적 이슈들이 더 큰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며 "동물들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몸집을 불려 겨울잠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 기업들이 앞으로 닥칠지 모를 더 큰 위험에 대비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경영 활동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