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머리 속에 전화번호 2500개가 저장돼 있습니다. 전화번호만 봐도 고객의 얼굴과 특징을 떠올릴 수 있죠."

현대자동차가 최근 '5000대 판매거장'으로 선정한 허정섭(59) 현대차 종로지점 영업부장은 책상에 낡은 노트 여러 권을 펼쳐 보였다. 1985년 현대차에 입사해 지금까지 기록해온 ‘고객 수첩’이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특징과 계약 정보를 볼펜으로 꾹꾹 눌러 빼곡히 적었다. 그는 "고객 수첩을 수시로 읽으며 기억을 새롭게 한다"면서 "10년 전 차를 산 고객이 갑자기 전화를 해도 어제 만난 것처럼 응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정섭 현대차 종로지점 영업부장은 지난달 현대차에서 9번째로 누적 파내 5000대를 달성한 ‘판매거장’에 올랐다.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허 부장은 현대차에 입사했을 때 품질관리 부서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영업직에 도전했다. 직급에 상관 없이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는 ‘자동차 판매왕’이 되고 싶었다.

그가 3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한 종로지점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도 영업이 어렵기도 소문난 곳이었다. 대기업 법인차량 계약이 많은 광화문, 을지로, 퇴계로 지점과는 달리 종로지점은 한 번에 한 대씩 구매하는 소상공인 고객이 많았다.

허 부장은 이런 곳에서 ‘판매거장’에 올랐다. 현대차가 누적 판매 5000대를 돌파한 영업 직원에게 부여하는 타이틀이다. 그는 지금까지 매년 평균 150대의 차를 팔았다. 지난해엔 320대를 고객에게 인도했다. 거의 매일 한 대씩 판매한 셈. 자기 이름으로만 판매할 수 없어 동료에게 넘겨준 차까지 합하면 누적 판매대수가 6800대에 이른다.

허 부장은 판매왕의 비결로 '성실함'을 꼽았다. 그는 지금까지 조퇴나 지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했고, 고객이 부르면 주말에도 달려갔다.

그의 ‘첫 판매’도 성실로 얻은 결실이었다. 당시는 현대차 종로지점이 동대문시장 앞에 있었다. 허 부장은 입사 후 매일 새벽 동대문시장에 전단지 700장을 들고 인사를 다녔다. 이런 모습을 좋게 본 원단가게 주인이 '그라나다' 승용차를 계약하며 그의 첫 고객이 됐다. 허 부장은 "만나자마자 차를 권하기보다는 얼굴을 꾸준히 비추며 상인들과 친해졌다"면서 "신발에서 고무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시장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허정섭 부장이 입사 이후 적은 고객 수첩들.

그는 한번 관계를 맺은 고객의 '신뢰'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허 부장은 "계약서를 쓰는 순간부터 각종 대금을 10원 한푼 어긋나지 않게 고객에게 보고한다"면서 "출고된 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전화해 차를 타면서 불편한 사항이 없는지 확인한다"고 말했다.

고객의 차가 고장나면 직접 AS(애프터서비스) 정비원과 함께 찾아가기도 한다. 합천 해인사의 스님이 34년에 걸쳐 9대의 차량을 허 부장에게 구매한 것도 이런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판매왕이 꼽은 최고의 현대차는 무엇일까. 허 부장은 2004년 출시된 '다이너스티 2.4'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1990년대까지만해도 현대차에 대한 고객들의 품질 불만이 많았다"면서 "다이너스티는 잔고장이 없고 실내 디자인이 좋아 거의 매일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허 부장은 지난해 연봉으로 약 3억원을 받았고, 세금으로 1억원 이상을 냈다. 하지만 실제로 가져가는 돈은 이보다 훨씬 적다. 허 부장은 "경조사비와 고객 판촉비로 연간 6000만원 정도를 쓴다"며 "지금의 나를 판매왕으로 만들어 준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으면 안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 부장은 "돈만 생각해선 너무 힘들어서 영업을 할 수 없다"며 "세일즈는 신뢰를 쌓으며 만들어가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 부장은 내년이 정년이다. 허 부장은 "퇴직 후에는 그동안 미뤄 두었던 여행도 할 겸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객들을 만나 식사를 대접하거나 감사의 선물을 전하려고 한다"며 "또 다른 바람이 있다면 35년 영업인생을 녹인 책 한권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