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말썽 없던 일본 재료에 문제가 생기니까 우리한테 '이것도, 저것도 개발하라'고 해요. 그런데 갑자기 되는 게 어딨습니까. 기술이란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죠."

국내 반도체 소재 기업인 동진쎄미켐을 창업한 82세 노(老)기업인의 말이다.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부섭(李富燮) 회장은 "일본 수출 규제는 당장 풀기 어려운 문제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소재 업체들이 기술력을 키우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기회"라고 했다. 동진쎄미켐은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 3종(種) 가운데 하나인 '포토 레지스트(감광액)'를 만드는 소재 기업이다. 소재 국산화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난 12일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경기도 화성의 동진쎄미켐 연구동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참석했다.

가내공업으로 시작

1967년 창업한 동진쎄미켐은 52년간 '소재 국산화'의 길을 걸었다. 포토 레지스트는 1989년 국내 최초, 세계에서 네 번째(미국·독일·일본)로 개발했다. 포토 레지스트는 반도체의 미세한 회로를 그리기 위해 원재료인 웨이퍼(wafer) 위에 뿌리는 감광(感光)액이다.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부섭 동진쎄미켐 회장은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 사태 이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자'고 연구진에게 강조했다"며 "한국 소재 업체들에 기회"라고 말했다. 동진쎄미켐은 이번 일본이 수출 제한한 3개 품목 중 하나인 포토 레지스트를 개발하는 소재 기업이다.

이 회장은 "소재를 무기로 쓴 일본도 문제지만, 선두만 바라보고 뛰느라 대안(代案)을 키우는 데 소홀했던 한국 역시 준비가 부족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반도체 후발 주자였기 때문에 품질 좋고 말썽이 없는 일본 소재를 써서 빨리 따라잡아야 했고, 기업인으로서 충분히 이해한다"며 "다만 국산이 좀 못나도 (대안을) 키웠어야 했는데 이런 사태가 닥칠 줄 모르고 안주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에서 '감광성 수지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은 이 회장은 1967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20평짜리 주택 연탄 창고와 안방 한쪽을 뜯어낸 자리에 반응기와 실험 설비를 들여놓은 게 시작"이라며 "한밤중에 펄펄 끓는 콩기름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고, 집에 암모니아 가스가 가득 차 온 식구가 대피한 적도 있다"고 했다. 1970년 당시 일본산(産)이 장악했던 고무·플라스틱용 발포제(發泡劑)를 국산화했고 현재는 해외까지 진출해 세계 발포제 시장 1위다. 발포제는 베이킹파우더가 밀가루 반죽을 포근포근하게 만들 듯 고무나 플라스틱에 첨가하면 거품을 발생시켜 재료의 성질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로 사업을 확장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 회장은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들이 거의 모든 재료와 장비를 일본·미국에서 전량 수입한다는 얘길 듣고 발포제로 번 돈을 모두 연구·개발(R&D)에 쏟아부었다"고 했다. 이후 포토 레지스트, LCD(액정표시장치) 액정, 디스플레이용 절연막 등 다양한 전자 재료를 하나 둘 국산화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8272억원. 현재 매출의 90%는 반도체·디스플레이용 소재, 나머지 10%는 발포제에서 나온다.

"기업이 아프다 할 때 정부도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기술 국산화는 '맨땅에 헤딩'의 연속이었다. 포토 레지스트를 개발할 때도 이 회사에서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대학원에서 '감광성 수지'를 연구한 이 회장뿐이었다. 미국·일본에서 퇴직한 엔지니어를 영입하고, 반도체 회사에 일하는 지인들에게 귀동냥으로 기술 정보를 얻었다. 중소업체에 오려는 연구자가 없어 대학교에 장학금을 줘가며 맞춤형으로 인재(人材)도 길렀다. 개발 착수 3년 만에 간신히 1M(메가바이트) D램용 포토 레지스트를 만들었다. 첫 국산화 제품이었지만 세계의 수준은 더 정밀한 4메가 D램을 테스트하던 때라 반도체 회사 문턱도 넘지 못했다.

외산(外産) 재료에 익숙한 대기업 납품 길을 뚫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회장은 "밤 12시든 새벽 3시든 고객사에서 연락만 오면 무조건 현장으로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10나노대 반도체용 제품을 만들 때는 고객사에서 자사가 보유한 것과 똑같은 1100억원짜리 제품 테스트용 장비를 갖추라고 요구해와 수소문 끝에 벨기에에 있는 유럽 반도체 연구소 장비를 연간 20억원씩 내고 빌려 써서 문제를 해결한 일도 있었다. 한번은 삼성전자에 납품한 포토 레지스트가 테스트를 통과했는데 다음 날 곧바로 침전물이 발생해 일주일간 반도체 라인이 멈추는 아찔한 일도 겪었다. 하지만 현재는 삼성이 안정적인 소재 확보를 위해 482억원을 투자해 이 회사 지분까지 사들일 정도가 됐다.

동진쎄미켐은 현재도 도전 중이다. 일본산 제품이 사실상 독점 공급 중인 첨단 EUV(극자외선)용 포토 레지스트 개발에 나선 것이다. 이 회장은 "현재 생산 중인 포토 레지스트와 '사촌 관계'의 기술인 만큼 충분히 해볼 만한 분야"라고 했다. 그는 '정부가 뭘 도와줬으면 하느냐'는 질문에 "정부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고, 산업계의 아픈 점을 일일이 알 수도 없다"며 "결국 기업이 주어진 환경에서 헤쳐나가야 할 문제"라고 했다. 다만 "현재 추진 중인 탈(脫)원전 정책처럼 기업이 진정으로 아프다고 호소하는 문제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