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상속세율과 까다로운 상속 공제 제도 때문에 가업 승계가 벽에 막힌 창업주들이 PEF(사모투자펀드)를 찾는 일이 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M&A(인수·합병) 시장에는 '가업 승계'의 큰 장(場)이 열렸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대형 PE(사모펀드 운용사) 대표는 "예전에는 '기업을 팔라'고 하면 화부터 내던 창업주들이 최근에는 먼저 매각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점과 조건 등을 물어보고 있다"며 "요즘 시장에 나오는 매물은 대부분 가업 승계를 포기해 매각하는 기업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세금 벼락… 현행법대로면 빚만 상속"

30년 전 국내 유명 소비재 회사를 창업한 80대 B씨는 5년 전 세 자녀에게 주식을 물려줬다. 200억원에 가까운 증여세를 부과받았는데, 얼마 뒤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이 벌어져 주가가 3분의 1 토막이 났다. 주가는 내렸는데 증여 당시 정해진 세금은 그대로여서 자녀들이 물려받은 주식 가치보다 내야 할 세금이 50억원이나 많아졌다. 결국 B씨의 세 자녀 중 막내는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나머지 두 자녀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식은 그대로 둔 채 은행 대출을 받아 세금을 내고 있다. B씨는 "내 인생의 3락(樂) 중 하나가 납세보국이었는데 말년에 세금 벼락을 맞게 됐다"며 "자식들이 말은 안 해도 '아버지가 나한테 빚만 남겨줬구나' 생각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최근 발표한 '2018년 중견기업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의 84.4%는 "가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그중 가장 큰 이유(69.5%)가 '상속·증여세 부담' 때문이었다.

중소·중견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별세 이후 아들 조원태 사장 등 3남매는 1700억원이 넘는 상속세를 내야 한다. 이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유 지분으로 주식 담보대출을 받고, 일부 계열사 지분은 팔아야 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상속세 납부를 위해 지분을 매각해 최대 주주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2017년 세상을 떠난 이수영 OCI 회장의 장남 이우현 부회장은 상속세 1900억원을 부과받았고, 이 중 1450억원을 납부했다. 이 부회장이 상속세 납부를 위해 지분 일부를 매각하면서 OCI 최대 주주는 이 부회장의 삼촌인 이화영 유니드 회장으로 바뀌었다. 이 부회장은 "앞으로 남은 세금 450억원도 열심히 내야 한다"며 "높은 상속세와 대주주 할증뿐 아니라,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팔면 주식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고, 거기에다 분할 납부에 따른 가산 금리까지 합치면 세금을 최대 75% 내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10년 동안 같은 사업 하라면 망하라는 이야기"

가업 상속 공제 제도를 통해 상속세 감면 혜택을 받을 수는 있다. 매출 3000억원 미만 기업 중, 10년 이상 경영한 기업은 200억원, 20년 이상은 300억원, 30년 이상은 500억원을 상속 재산 중에서 공제해주는 제도다. 단, 이 혜택을 받으면 10년간 자산의 20% 이상을 처분할 수 없고, 직원을 줄일 수도 없으며, 10년 간 주(主) 업종을 변경할 수도 없어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양변기 부품 등을 제조하는 매출 200억원의 와토스코리아 송공석(67) 대표는 "시대 변화에 따라 사업 종목도 바뀔 수밖에 없는데, 상속 문제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와토스코리아는 주로 플라스틱 욕실 제품을 생산하는데, 세라믹 제품으로 바뀌면 공제를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상속세 구조는 사업을 키우지 말고 현금으로 빼돌려 갖고 있다가 물려주라는 식"이라며 "떳떳하게 벌고 키워서 떳떳하게 물려주는 경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동화, 무인화되는 경영 상황에서 10년간 종업원 수 유지 조건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가업 승계를 앞둔 중소기업은 외주화나 비정규직화 등을 통해 종업원을 미리 줄이는 등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이런 상황이다 보니 '터널링(tunneling· 거래망에 자녀 소유의 자회사를 끼워 넣어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 등 다양한 상속·증여 편법이 등장하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