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실시된 서울 서대문구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 청약에 당첨된 직장인 김모(41) 씨는 고민 끝에 계약을 포기했다. '일단 넣고 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했지만, 당첨 후 주변 공인중개업소들에 물어보니 분양가가 비싸다는 평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청약통장이 아깝긴 하지만 집값 떨어져 마음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아파트 청약시장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장에 나왔다 하면 순식간에 완판되며 '로또'로 통했지만, 최근 들어 당첨되고도 계약하지 않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로또는 옛말, 서울 청약 미계약 속출

14일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평균 청약 경쟁률 11대1을 기록했던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 일반분양분 419가구 중 174가구가 미계약됐다. 정부가 청약시장 과열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인 '1순위 경쟁률 10대 1 이상'에 해당한 아파트가 결과적으로 10명 중 4명꼴로 미계약이 발생한 것이다.

지난 1월 분양한 동대문구 'e편한세상 청계센트럴포레' 역시 청약 경쟁률은 33대 1에 달했지만 실제 계약에서는 403가구 중 90가구가 주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 2월 분양한 노원구 '태릉 해링턴 플레이스'도 청약 1순위 마감에 성공했지만 560가구 중 62가구(11.1%)가 아직 미계약 상태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대출 규제가 강력하고 최근 시장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은 탓에 서울 새 아파트라 할지라도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곳은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고분양가·대출규제에 실수요자 부담 커져

전문가들은 분양 아파트 계약률이 저조한 가장 큰 이유로 분양가를 꼽는다. 분양가는 주변에서 최근 분양한 아파트의 분양가 또는 주변 시세를 기준으로 책정한다. 지난해까지 서울 아파트 시세가 많이 오른 탓에 올 들어 분양하는 아파트들의 분양가도 높아졌다. 반면 9·13 대책 등 정부 규제 여파로 지난해 11월부터 서울 아파트값 상승세는 꺾였고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주변 아파트와 분양가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면서 시세 차익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들었고, 일각에서는 높은 분양가로 상투 잡아 집을 사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일례로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 전용면적 84㎡의 분양가는 8억원대 초반부터 8억9000만원 수준으로, 최근 입주한 홍제 센트럴아이파크의 비슷한 평형의 호가(呼價)가 9억원대 초반부터 시작되는 것과 비교하면 분양가가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출 규제도 실수요자 입장에서 큰 부담이다. 분양가 9억원 이하 아파트는 중도금 대출이 가능하지만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는 담보대출비율(LTV)이 집값의 40%로 제한된다. 분양 대금 중 입주 때 내는 잔금 비율이 보통 20%이므로 입주 예정자는 분양 대금의 40%를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9억원짜리 아파트라면 최소 3억6000만원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규제 무풍지대 무순위 청약 광풍

미계약분 아파트는 모델하우스에서의 선착순 분양, 인터넷 추첨 등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장에 나온다. 미계약분은 만 19세 이상이면 청약 통장이 필요 없고 다주택자여도 분양을 받을 수 있다. 최근 서울 분양 단지에서도 미계약분이 늘어나자 1순위 청약 이전에 향후 미계약 시 추첨 대상을 먼저 뽑아놓는 '사전 무순위 청약'이 도입됐다.

지난 10~11일 서울에서 처음으로 무순위 청약을 실시한 동대문구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 아파트에는 1만4376건의 무순위 청약 신청이 접수됐다. 분양대행사 관계자는 "청량리 역세권에 들어서는 초고층 주상복합 단지로, 주변 새 아파트에 비하면 2억원 정도 저렴하고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경전철 등 교통 호재가 많아 실수요자뿐만 아니라 현금 여력 있는 자산가들의 문의가 특히 많다"고 했다. 부동산업계에서는 청약 규제 무풍지대인 무순위 접수에 청약 가점이 낮은 무주택자, 향후 시세 상승을 기대한 다주택자 등의 수요가 대거 몰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아파트도 전용 84㎡ 중 분양가가 9억원이 넘어 중도금 대출 규제 대상이 되는 주택이 있는 만큼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당첨자도 적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높아진 분양가와 대출 규제 때문에 서민 실수요자들에게 서울 새 아파트는 '그림의 떡'이 된 반면, 자산가와 다주택자는 미계약분을 주워 담을 수 있는 방향으로 시장이 흘러가고 있다"며 "무주택자와 1주택자에게는 대출 규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법도 고민해볼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