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겨울에 아침 10시는 되어야 해가 뜨고 오후 3시면 노을을 볼 수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각) 핀란드 헬싱키 메스게스구스 박람회장을 가는 길은 이가 딱딱거릴 정도로 춥고 을씨년스럽웠다. 실내에 들어섰지만, 바깥처럼 어두컴컴했다. 잠시 후 무대 위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더니 클럽에 온 것처럼 음악에 맞춰 래퍼가 춤을 추며 공연을 했다.

세계 최대 스타트업 박람회 '슬러시 2018'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박람회에는 전 세계 3100여개 스타트업 관계자와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려는 1800여명의 투자자들이 몰려왔다.

이틀간 열린 슬러시 2018은 창업인들의 축제였다. 가장 우수한 스타트업을 뽑는 '슬러시100 콘테스트', 스타트업·투자자·언론·대기업을 연결해주는 '매치 메이킹', 스타트업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는 강연, 누구나 헬싱키 어디에서든 개최할 수 있는 ‘사이드 이벤트’ 등으로 구성됐다.

슬러시 참석자는 2011년 1000여명에서 올해 2만여명으로 급증했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지멘스, 바스코, 롤스로이스 등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대기업들의 전시관도 예년보다 2~3배 늘어났다.

하지만, 거대한 이 행사의 주인공은 대기업이 아니었다. 아직 대학생인 안드레아스 사리(Andreas Saari) 대표와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알렉산더 피흐라이넨(Alexander Pihlainen)가 슬러시의 대표다. 행사 진행을 주도하는 것도 학생들이다. 행사를 경험하고 즐기려는 2400여명의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지난 3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막한 ‘2018슬러시’. 어두컴컴한 실내 공간에서 화려한 스타트업 축제가 이틀간 진행됐다.

◆ 노키아 위기 속 싹튼 창업열기

인구 550만명의 작은 나라 핀란드가 스타트업 활성화에 눈 돌린 것은 노키아의 몰락을 겪으면서부터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한국의 삼성전자였다.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의 40%를 장악했던 노키아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24%를 책임졌다. 하지만, 노키아가 몰락하면서 핀란드 경제성장률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위기감을 느낀 핀란드 정부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2008년부터 대학생들에게 창업을 권하고 지원했다. 핀란드 알토대 학생들은 총장을 찾아가 손세정제를 보관하던 창고를 창업공간으로 쓰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핀란드 알토대 창업동아리 '알토에스'에서 탄생한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스타트업 사우나'를 통해 학생 주도의 창업이 시작됐다. 정부, 대학, 기업 관계자들이 힘을 모아 체계적인 지원에 나섰다. 그 결과 앵그리버드 게임으로 대박이 난 루비오, 클래시오브클랜을 만든 슈퍼셀, 음악 스트리밍업체 스포티파이 등의 세계적인 스타트업들이 탄생했다.

슬러시는 2008년 노키아 출신으로 루비오를 창업한 피터 베스터바카 등이 처음 만들었다. 창업자끼리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시작된 사교모임이었는데, 2011년 로비오가 앵그리버드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운영권을 학생들에게 넘겨줬다. 이후 슬러시는 스타트업 사우나를 중심으로 대학생들 중심의 슬러시 조직위원회가 개최하고 있다. 핀란드 정부는 행사기간 입장권을 소지한 사람에게 헬싱키 시내 3일 무료 교통권을 줄 정도로 지원에 적극적이다.

슬러시 2018 행사를 기획한 안드레아스 사리 CEO는 "노키아는 핀란드에 절대 안주하거나 오만하지 말라는 교훈을 줬다"면서 "슬러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 창업자의 키워드 "기업가 정신" 강조

이틀간의 행사 중 160명의 선배 기업인들이 강단에 올랐다. 이들은 자신의 성공 경험담, 최신 산업 트렌드, 투자 유치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이었다.

리스토 실라즈마(Risto Siilasmaa) 노키아 회장은 "기업가 정신의 바탕인 오너십은 창업주의 필수 요소"라고 말했다. 그는 "슬러시 행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학생들이지만, 이들의 마음 속엔 슬러시를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기업가 정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행사가 이 정도로 커질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한 이벤트브라이트(Eventbrite)의 줄리아 하르츠(Julia Hartz) 공동창업자는 "나는 무엇인가가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의 칩을 빼버렸다"며 "확신과 함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세, 늘 배고픔을 느끼는 열정과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벤트브라이트는 이용자가 이벤트를 만들거나 다른 사람의 이벤트에 참여해 티켓을 사고 파는 업체다. 스마트워치 제조사 미스핏 창업자 소니 부는 "성공담보다 실패담을 나누는 게 더 의미있다"고 말했다.

슬러시는 내년 말부터 무료로 멘토십, 인턴십을 받을 수 있는 '슬러시 아카데미'를 선보인다고 밝혔다. 피흐라이넨 슬러시 대표는 "창업에 가장 중요한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연다"며 "슬러시 아카데미는 벤처투자자, 성장 기업, 세계적 대학들과 파트너를 맺고 무료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아카데미에는 한국의 카이스트도 협력 대학으로 참여한다.

지난 3~4일 열린 세계 최대 스타트업 박람회 ‘슬러시 2018’에서는 대학생 자원봉사자 2400여명이 곳곳에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 韓 스타트업 적극 참여…슬러시 참여 스타트업 수 4위

올해 슬러시에는 한국 스타트업도 70여개가 참여했다. 국가별 참가 스타트업 수로는 네 번째로 많았다. 이 중 코클리어닷에이아이는 피칭(짧은 기업 소개)을 통해 가장 우수한 스타트업을 뽑는 `슬러시100 콘테스트` 15위에 올랐다.

올해 슬러시에 참여한 톤28의 박준수 대표는 "회사를 알리고자 슬러시에 참여하게 됐다"며 "현장에서 바이오더마 화장품을 만드는 프랑스 나오스(NAOS), 영국 벤처캐피탈을 만나 향후 투자 논의를 해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톤28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후변화를 감지해 맞춤형 화장품을 만들고 있다.

김연재 코트라 헬싱키 무역관장은 "한국 스타트업들이 망설이지말고 도적적으로 참여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투자를 포함한 다양한 네트워킹을 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코트라는 현재 전세계 85개국 127개소에 진출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스타트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지원하고있다.

권평오 코트라 사장은 지난 9월 향후 3년간 150개의 해외 창업기업을 배출하고 해외 취업자 수를 2735명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기 위해 미국 뉴욕·실리콘밸리,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등을 창업 거점 무역관으로 지정했다.

한국도 정부가 나서 창업을 지원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인 스타트업이 두각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헬싱키 스타트업 육성기관인 뉴코헬싱키 이사회 떼무 폴로(Teemu Polo) 참관인은 "한국기업이 유럽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현지 파트너를 잘 만나는 것은 물론 영어로 원활한 의사소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KCERN) 이사장은 "핀란드 모델이 한국의 대안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한국도 대기업을 잘 활용해 스타트업의 융합이 이뤄지는 모델로 산업구조를 바꿔 나가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