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모투자펀드(PEF) 운용사인 KCGI가 지난 15일 한진칼(180640)의 주식 9%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올랐다. 한진칼은 대한항공(003490), 진에어 등을 거느린 한진그룹의 지주사로 최대주주는 17.84%를 보유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다.
KCGI를 이끄는 강성부 대표는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2005년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보고서를 냈던 인물이다. KCGI는 일반적인 국내 PEF와 달리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주주가치 상승을 목표로 한 ‘행동주의 펀드’로 알려져 있다. KCGI는 이번에 한진칼 지분을 매입하면서 그룹 경영에 적극적인 권리를 행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금융시장과 재계에서는 한진칼이 ‘한국판 엘리엇’을 표방하는 KCGI의 공격대상이 된데 대해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 많다. 행동주의 펀드는 총수의 독단적인 경영이나 그릇된 판단으로 흔들린 회사를 주요 타깃으로 한다. 올들어 한진그룹이 조 회장 일가의 ‘갑질 파문’으로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고 주가도 하락한 만큼 KCGI에게 최적의 ‘먹잇감’이 됐다는 분석이다.
◇ 갑질 파문·기업가치 하락에 주주 불만…일각선 정부 입김 추측도
올해 한진칼을 포함한 한진그룹 계열사의 투자자들은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 파문 이후 회사가치가 크게 하락해 적잖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시작은 지난 4월 조 회장의 딸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논란이었다. 조 전무가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컵을 던지고 폭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한항공은 국민적 공분을 샀고 급기야 조 전무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조 전무의 갑질 논란 이후 정부가 전방위 조사에 나서면서 조 회장 일가는 과거 행적으로 더 큰 논란에 휘말렸다. 조 전무의 어머니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운전기사와 호텔 공사 관계자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한 사실이 알려졌고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조양호 회장 역시 탈세와 횡령, 배임 혐의 등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진그룹 계열사들의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대한항공은 지난 4월 2일 3만4350원에서 6월말 2만8250원으로 17.8% 하락했고 한진칼도 같은 기간 20.4% 떨어졌다. 진에어는 조현민 전 전무의 불법 등기이사 선임으로 항공업 면허 박탈 위기까지 몰리며 역시 주가가 20% 넘게 하락했다.
송치호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한진그룹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와 총수일가 이슈로 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며 "조 회장을 비롯한 가족과 특수관계인 지분을 다 합쳐도 29%에 불과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가능성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소유권 승계가 완료되지 않아 그룹 내 자산이 저평가를 받아온 점도 투자자들의 불만이 쌓인 이유로 꼽힌다. 한진칼은 칼호텔네트워크와 정석기업, 한진관광, 와이키키리조트호텔 등 여러 비상장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서울 송현동을 비롯해 제주, 인천 등에도 광범위한 부동산을 보유 중이다. 그 동안 장부가로 평가받아온 자산들이 시가로 재평가를 받을 경우 조 회장 일가의 소유권 승계는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투자자들의 자산 가치는 크게 상승한다.
일각에서는 이른바 ‘물컵 갑질’ 파문 이후 6개월간 이어진 전방위 수사에도 불구하고 조 회장 일가의 경영활동에 별다른 제동을 걸지 못한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한진칼의 주요 주주인 한국투자신탁운용, 외국계 자본인 크레디트스위스 등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사모펀드를 이용해 정부가 다시 조 회장의 경영권을 흔드는데 나섰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금융시장에서는 KCGI의 지분 매입이 가치 제고를 위한 전략일 뿐 정부 개입론은 무리한 접근이라는 의견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한진칼은 이미 국민연금이 8% 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정부가 경영 개입을 위해 사모펀드까지 지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KCGI의 지분 매입은 총수 지배력이 흔들리는 틈을 타 다른 기관투자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정부 ‘전방위 조사’ 이겨낸 조양호 회장…토종펀드 공격 대응은 어떻게
금융시장과 재계에서는 내년 3월 열릴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KCGI가 이사진 교체를 통해 조양호 회장의 경영권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것으로 예상한다. KCGI는 그 전까지 국민연금, 한국투자신탁운용, 크레디트스위스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과 ‘연합군’을 결성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현재 한진칼에서 조 회장 일가 등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은 28.95%다. 국민연금은 8.35%, 크레디트스위스는 5.03%, 한국투신운용은 3.81%를 보유 중이다. 9%를 보유한 KCGI가 국민연금, 크레디트스위스, 한국투신운용과 손을 잡을 경우 4곳의 지분율은 단숨에 26.19%로 조 회장 일가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수준이 된다.
현재 한진칼은 조양호 회장과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석태수 대표이사 등 3명의 상근임원과 이석우, 조현덕, 김종준 등 3명의 사외이사, 윤종호 상근감사 등 7명의 이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석태수 대표 등 3명의 이사와 윤종호 감사의 임기가 내년 3월 17일 끝난다. 특히 석태수 대표는 그 동안 조양호 회장의 대표적인 측근으로 꼽혀온 만큼 내년 주총에서 자리를 떠날 경우 조 회장의 경영활동도 타격을 받을 가능성어 커진다.
재계 관계자는 "조 회장이 KCGI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하려면 주요 기관투자자 중 한 곳이나 소액주주들을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며 "자사주 매입을 포함한 획기적인 주주 친화정책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