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이 내년 서울 서초 방배동 주택가를 재개발해 분양할 아파트는 주방 구조가 독특하다. 요리를 하는 곳과 식사를 하는 곳이 분리돼 있다. 식사 장소를 거실과 통합해 하나의 직사각형을 이루도록 했고, 6인용 대형 아일랜드 식탁을 뒀다. 가스레인지·싱크대 등을 포함하는 조리 공간은 미닫이문 밖 발코니 확장 공간에 배치했다. 발코니 확장 공간은 최근 수년간 주택업계가 '보조 주방'으로만 활용해온 공간이다. 결과적으로 주방의 전면으로 거실이 들어오고 부엌은 뒤꼍으로 빠진 셈이다. 현대건설은 이 평면을 'H 세컨리빙'으로 이름붙였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최근 젊은 맞벌이 부부를 중심으로 식사는 배달 음식이나 간편 조리 음식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식탁에서 컴퓨터로 일하거나 자녀 숙제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착안한 구조"고 말했다.

아파트 평면이 입주민의 생활상과 시대 변화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건설사들은 거실 공간을 확대하고, 주민의 취향이나 생애 주기를 고려한 선택형 평면을 도입하고 있다. 조부모(祖父母)에 결혼한 자녀 부부까지 함께 사는 '3세대 동거'나 쉐어하우스(공유주택) 등을 겨냥한 특화 평면도 개발된다.

◇넓어지는 아파트 거실

13일 통계청의 '한국인의 생활시간 변화상'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이 하루 평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14시간 59분. 15년 전(1999년·14시간 35분)보다 24분 증가했다. 이에 맞춰 아파트 공간도 가족이 모여 함께 휴식을 취하는 거실 면적이 넓어지고 있다. 4월 대한건축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32평(공급면적105㎡) 아파트에서 거실이 차지하는 평균 면적은 1990년대 20~22㎡에서 2006년 이후 27㎡로 약 2평(5~7㎡) 늘어났다.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에서는 넓은 거실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강원도 원주기업도시에서 분양 중인 '원주기업도시 EG the1(이지더원) 2차'의 전용 84㎡ 주택형은 최근 유행인 4베이(방 3개와 거실을 발코니 전면 배치) 대신 3베이 구조를 택했다. 보조침실 하나를 주방 쪽으로 빼내면서 거실 폭이 같은 면적의 다른 아파트보다 폭이 1m~ 1.5m가량 넓은 5.9m가 됐다.

거실·방 크기 선택 가능

거실의 크기와 방의 개수를 조절할 수 있는 '변신형 아파트'도 나온다. 4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에서 분양한 주거용 오피스텔 '힐스테이트 범계역 모비우스'의 전용 49㎡는 '침실강화형'과 '거실강화형'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침실을 2개로 구성해 어린 자녀 방이나 서재 등으로 쓰거나, 방 하나를 만드는 벽을 없애 거실 폭을 5m까지 넓힐 수 있는 구조다.

대림산업이 2016년 개발한 '디하우스(D.House)' 평면은 하중을 견디는 내력벽(고정)을 최소화해 주방·화장실 등 습식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원룸처럼 열린 공간으로 두고 경량 벽체를 활용해 원룸형, 투룸형부터 방 5개 형태까지 다섯 종류로 꾸밀 수 있도록 했다.

'따로 또 같이' 평면도 늘어

동거인의 사생활을 보장하면서도 공동 공간은 확보한 '따로 또 같이' 평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조부모와 부부, 미혼 자녀가 함께 사는 3세대 가족 비율이 2010년 1%에서 2015년 3.1%로 늘어나고, 1인 가구 증가로 둘 이상이 하나의 주택을 공유하는 쉐어하우스가 인기를 끄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롯데건설이 최근 개발한 '트리플 캐슬하우스'가 대표적이다. 경사진 곳에 들어서는 아파트의 높낮이 차(差)를 활용, 선호도가 낮은 아파트 1층 가구를 지하 2개 층과 지상 1개 층 등 총 3개 층의 단독주택처럼 설계한 것이다. 지상 1층에 거실과 부부 침실을 두고 지하 2개 층을 자녀 방이나 가족실, 취미실 등으로 활용해 하나의 주택으로 연결해 쓸 수 있다. 은퇴 세대와 독립한 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 또는 지하 세대를 부분 임대하는 경우에는 지상과 지하층을 분리하면 된다.

현대건설이 개발한 'H 위드'는 현관문을 열면 나타나는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개별 출입문, 욕실, 주방과 방을 갖춘 두 세대가 배치된 '한 지붕 두 가족' 형태의 아파트다. 자녀, 룸메이트, 간병인 등 함께 생활하는 이들을 위한 신개념 쉐어하우스라고 현대건설은 설명한다.

공기업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도 지난 9월 주부 등 소비자와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해 신평면을 개발했다. 전용 51㎡, 59㎡, 84㎡ 평면이 1~2인가구, 신혼부부, 3세대 동거에 특화한 설계다. 김희정 피데스개발 R&D센터장은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집에서 취미와 여가를 즐기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의 인기로 인해 현대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며 "다양한 주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아파트 평면 개발이 더욱 탄력받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