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미국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의 미국 내 4692개 모든 매장 입점. 2016년 미국 라면 시장 점유율 3위(15%). 전 세계 하루 판매량 300만개, 1분 판매량 2083개. 최근 30년 사이 라면 수출액 60배 증가. 세계 최대 라면 시장인 중국 매출액 18년 연속 평균 23.5% 증가. 유럽의 지붕으로 불리는 융프라우에서 지구 최남단 도시인 칠레의 푼타아레나스까지 세계 100여개국 수출. 1965년 라면 사업에 뛰어든 농심이 1971년 소고기라면을 미국에 처음 수출한 지 46년 만에 해외시장에서 거둔 성과는 남다르다.

특히 1986년 출시한 매운맛 신라면은 기폭제 역할을 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월마트 모든 매장에 신라면이 입성한 것은 기념비적인 일로 평가된다. 미국 식품 유통의 20%를 차지하는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서 파는 식품은 코카콜라, 네슬레, 켈로그 등 세계적인 브랜드뿐이다. 월마트가 최근 5년 동안 미국에서 매년 평균 30% 이상 판매 성장률을 보인 신라면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인정한 셈이다. 한국인의 라면에서 세계인의 라면으로 성장한 농심 신라면의 성공 비결을 분석했다.

1987년 1월 서울 용산구 서계동 농심빌딩의 임원회의실. 신춘호 당시 사장(현재 회장)은 임원들과 며칠 동안 회의를 연 끝에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방식대로 가자. 한국의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다"며 한국 제품을 그대로 수출하기로 결정한다. 단순히 맛뿐 아니라 제품 규격, 포장 디자인까지 똑같이 하기로 했다. 국내에 출시한 신라면이 석 달 만에 3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 것도 경영진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본격적인 수출은 그해 4월 일본 도쿄·오사카에 신라면을 팔면서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교포가 많은 로스앤젤레스 등에도 신라면을 수출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신라면을 처음 맛본 일본 사람들은 "맛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 라면은 면만 팔팔 끓인 다음 그릇에 담고 수프를 넣어서 섞어 먹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신라면을 그렇게 먹은 것이다. 1994년 중국에 진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도 면과 수프를 같이 끓여 먹는 라면은 거의 없었다. 뜨거운 물을 면에 부어 먹는 라면이 주류였다. 일부 중국인은 "끓여 먹는 것은 라면이 아니다"고도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농심 내부에서조차 "그 나라에 맞게 맛을 현지화해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매운 것을 못 먹는다"며 전략 수정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신 회장은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해법은 '맛은 한국맛-마케팅은 현지화'였다.

농심은 해외 진출 초기부터 철저한 현지화 마케팅에 나섰다. 중국에선 무엇보다 끓여 먹는 라면 문화를 전파하는 게 시급했다. 역, 백화점, 대형마트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끓여 먹는 라면 시식회를 열었다. 홍콩배우 쩡즈웨이(曾志偉) 등이 출연한 광고에서도 라면 문화 바꾸기에 총력전을 폈다. 당시 광고는 아버지가 "라면은 어떻게 먹어야 맛있지"라고 물으면 아들이 "당연히 끓여 먹어야 맛있죠"라고 답하는 내용이었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바둑을 활용한 마케팅도 주효했다. 1999년 12월 상하이에서 시작된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은 올해로 19회를 맞을 때까지 신라면 브랜드의 현지 인지도 상승에 톡톡히 기여했다. 이런 현지화 전략은 2000년 초반이 지나자 효과로 이어졌다. 농심 라면을 찾는 중국 소비자들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 매출액은 1999년(700만달러)부터 지난해(2억5200만달러)까지 18년 연속 가파르게 증가했다. 올해 매출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31% 늘어난 3억3000만달러(약 3710억원)로 잡았다.

일본에서는 2010년부터 4월 10일을 '신라면의 날'로 지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신라면 키친 카(라면을 끓일 수 있도록 개조한 차)'로 주요 도시를 다니며 신라면 브랜드를 알리고 있다. 지난해 일본 매출액은 4000만달러로 전년보다 33% 늘었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즐기는 외국인.

미국 진출 초기엔 구매 고객의 대부분이 한국 교포였으나 1998년에는 중국·베트남·일본 등 아시아계가 전체의 25%, 중남미, 히스패닉계가 10%를 차지하는 등 한국인 이외의 소비층이 35% 이상으로 늘었다. LA다저스, 뉴욕양키스 등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야구팀과 스폰서십을 맺고 홈경기 때 시식회 등 스포츠 마케팅을 꾸준히 진행한 결과다. 지난해엔 미국 라면 시장에서 일본 토요스이산(東洋水産), 닛신쇼쿠힌(日?食品)에 이어 3위로 올라섰다.

"농심 라면이 현지인의 입맛에 맞으며 안착하는 데 약 10년이 걸렸다. 리더의 흔들리지 않는 경영 비전과 철학이 없었다면 신라면의 글로벌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유창조 동국대 교수)

농심이 일본·미국·중국에 진출했을 때 현지 수입상에게서 많이 들었던 말은 "비싸다"였다. 그때마다 농심은 최고의 원료로 최첨단 시설에서 안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저가 제품과 원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런 프리미엄 전략은 현지 업체와 가격 경쟁에선 이기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품질 차별화로 승부를 걸었다.

농심 라면이 중국과 일본에서 터진 식품 안전사고에 한 번도 연루되지 않으면서 프리미엄 전략은 날개를 달았다. 중국에서 팔리는 신라면 가격은 중국 일반 라면의 배(倍) 수준인 4.5~5위안(약 765~850원)이다.

미국 시장에 안착하는 과정에서도 프리미엄 전략은 효과를 톡톡히 발휘했다. 농심이 미국에 진출했을 때 일본 업체들의 저가 라면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농심은 이들과 저가 경쟁을 피하고 오히려 고품질 제품으로 차별화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금도 미국에서 판매되는 일본 라면은 개당 25~30센트인데, 농심 라면은 1달러 안팎으로 3~4배 비싸다.

농심 라면은 지난해 5월부터 미 국방부와 국회의사당 등 정부기관 내 수퍼마켓에서도 팔리고 있다. 신라면과 너구리 등은 미국 정부 기관에서 팔린 첫 라면이다. 라면 종주국인 일본 제품은 미국 시장에 먼저 진출했지만 저가 이미지가 강해 탈락했다.

이른바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전략도 성공 비결이다. 농심은 여러 시장에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곳에서 제품을 정착시킨 뒤 그 성공 스토리로 다른 지역을 공략했다. 미국에선 서부, 교포 시장에서 기반을 다진 뒤 저변을 넓혔고 중국에서는 해안 지역과 대도시에 우선 치중한 뒤 시안(西安), 청두(成都) 등 내륙으로 진출했다.

'신라면 신화' 주역 신춘호 농심 회장

윤민혁 조선비즈 산업부 기자

'신라면 신화'의 주역은 신춘호 농심 회장(85)이다.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는 그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동생이다. 롯데 전무로 일하던 신 회장은 1963년 형에게서 독립해 1965년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사를 세웠다. 그해 농심의 첫 라면인 '롯데라면'을 출시하며 국내 라면 시장에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몇 차례 존폐의 기로에 서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신 회장은 위기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신제품 개발로 돌파구를 찾았다. 당시 10명 남짓한 초기 연구원들과 밤을 새워가며 만든 신제품이 위기 해결사 역할을 했다. 그는 "고비 고비마다 '짜장면' '소고기라면' '새우깡' 등 히트 신제품이 나와 회생의 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신 회장이 라면을 농심의 주력 사업으로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는 1960년대 초 일본을 드나들며 라면을 처음 접했다. 그때 '이거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맛도 좋았을 뿐 아니라 만들기도 간편해 새 사업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산업화·도시화의 큰 물결을 타던 일본에서 라면은 대히트 상품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 실행으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던 우리 상황과도 맞아떨어졌다.

10남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보릿고개를 넘겼던 어린 시절 아픈 기억도 신 회장의 결심에 한몫했다. 신 회장은 "값이 싸면서도 우리 입맛에 맞는, 간편식이 아닌 주식으로서 라면을 떠올리고 라면 사업에 젊음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의 이런 신념은 '신라면 신화'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27년 연속 국내 라면 시장점유율 1위, 누적 판매량 290억개, 누적 매출 11조3000억원이라는 신라면의 대기록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농심은 2025년 매출 7조원, 해외 사업 비중 4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농심의 해외 매출 1, 2위 시장인 중국과 미국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중남미를 공략해 '신라면'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브랜드로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