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운전자상가의 디지털 제작소 '팹랩서울'. 대학생 권다현(22)씨가 컴퓨터에 달린 카메라에 글이 적힌 종이를 비추면서 "무슨 글이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컴퓨터 스피커에서 "강원도, 강릉시, 휴가"라는 답이 나왔다. 컴퓨터가 글을 읽은 뒤 주요 단어만 뽑아낸 것이다. 권씨가 "읽어줄래?"라고 말하자 컴퓨터가 소리내어 전체 글을 읽기 시작했다. 권씨를 비롯한 대학생 5명으로 구성된 '헬로 월드'팀은 시각장애인을 돕기 위해 이 서비스를 만들었다. 소프트웨어 전문 개발자나 인공지능(AI) 전문가 없이 SK C&C의 AI 프로그램인 에이브릴을 이용해 완성했다. 헬로 월드팀은 이날 SK C&C가 주최한 AI 활용 경진대회 '에이브릴(Aibril) 메이커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에이브릴은 IBM이 개발한 AI 프로그램 '왓슨'을 SK C&C가 한국어용으로 만든 것이다.

SK C&C는 6개 참가팀에게 2시간 동안 에이브릴 기능 활용법을 가르쳤다. 이어 하루를 주고 팀마다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도록 했다. 한 참가자는 "AI 서비스는 대기업만 개발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고 말했다.

13일 서울 종로구 세운전자상가에서 열린 SK C&C의 인공지능 활용 경진대회‘에이브릴 메이커톤’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제작한‘스마트 미러(거울)’를 시험해보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 모니터 표면에 반사 필름과 유리를 붙여 전자 거울을 만들고,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AI 프로그램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대답할 수 있게 했다.

누구나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AI를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AI 기술을 보유한 대기업들이 AI 기반 서비스 확산과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일반인들에게도 무료로 AI 프로그램을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고 조립하는 것처럼 인공지능 만들어

'픽미'라는 참가팀은 에이브릴에게 운동기구 사진 수천 장을 학습시켜 운동기구 종류를 구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에이브릴에게 카카오톡으로 말을 건 뒤 운동기구 사진을 보내면 에이브릴이 사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 알려주도록 했다. 다른 참가팀은 '스마트홈'을 구현했다. 에이브릴이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는 점에 착안해 "더워"라는 명령어로 선풍기를 켜고, "침대 쪽으로 돌려"라고 말해 선풍기 방향도 바꿨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말하는 거울'을 컴퓨터 모니터로 구현한 팀도 있었다.

SK C&C는 지난달 에이브릴의 시험 버전을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에이브릴 홈페이지에 접속하기만 하면 경기도 판교 데이터 센터에 있는 에이브릴을 인터넷으로 불러내 일을 시킬 수 있다. SK C&C 관계자는 "이미 개발돼 있는 AI의 주요 기능을 마치 레고를 조립하는 것처럼 조합하면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다"면서 "전용 AI를 개발하기 어려운 개인이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도 쉽게 AI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개방으로 기회 찾는 IT업체들

국내외 IT기업들은 앞다퉈 AI 개방에 나서고 있다. 거액을 들여 개발한 AI를 독점하는 대신 다른 기업이나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공개해 인터넷이나 모바일 상용화 때처럼 다양한 서비스가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자는 취지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AI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영향력이 커지고 더 많은 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서 "AI를 공개하는 기업으로서는 고객의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뿐더러, 일정 수준 이상 고객이 모이면 유료화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IBM은 전 세계적으로 협력사를 모아 왓슨을 의료, 법률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마존은 자사 AI인 '알렉사'의 기능을 '알렉사 스킬 킷(기술 묶음)'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했고 삼성전자·LG전자·월풀 등 글로벌 가전업체들이 알렉사를 탑재한 가전제품을 알아서 만들어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구글도 자사의 AI 기술을 '텐서플로'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용 도구로 만들어 공개했다. 그 덕분에 텐서플로는 AI 분야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소프트웨어가 됐다. 페이스북애플도 지난해부터 AI 기능을 개방하면서 생태계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가 AI 개방의 선두에 서 있다. 네이버는 음성인식 AI인 '클로바'와 번역 AI인 '파파고'를 무료로 공개해 앱 개발자들이 새로 만드는 앱에 네이버의 음성인식·번역 기능을 넣을 수 있게 했다. 카카오도 카카오페이·카카오내비·지도 등의 AI 기능을 무료로 풀었다. AI 기술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꼽고 있는 삼성전자, SK텔레콤, KT도 자사의 AI 기능을 공개했거나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