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2위 그룹인 삼성과 현대자동차가 ‘10조원 베팅’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삼성은 사업 구조조정과 사옥매각 등을 진행하면서도 올해 11월 미국 자동차 전자장비 회사인 하만(Harman) 인수에 80억달러(9조4000억원)를 썼다. 현대차는 2014년 9월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매입하고 현재 신사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두 그룹이 10조원 투자에 나서면서 공통적으로 제시한 키워드는 ‘글로벌’이다. 삼성은 하만 인수로 “커넥티드카용 전자장비 시장에서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서울 삼성동에 들어서는)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는 100년 앞을 내다본 글로벌 컨트롤타워로서 그룹 미래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 그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삼성은 라이프사이클이 짧은 전자 산업의 특성상 앞서 미래를 준비하고, 실리콘밸리식 경영방식으로 혁신을 추구한다. 현대차는 수직계열화와 품질관리를 강조하면서 내부 경쟁력 강화에 신경을 쓴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삼성은 내부 역량이 부족하다면 외부에서 인수합병(M&A)이나 인재 영입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면서 “현대차는 모비스(자동차부품)와 글로비스(물류)를 성공시킨 것처럼, 회사 자본을 외부보다는 내부 역량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 삼성, 사람도 기업도 핵심에 집중…현대차, 자산 확보하고 연구개발 투자 확대

이재용 부회장이 이끄는 뉴 삼성은 1·2세 경영 시절과 달리 철저하게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으로 움직인다. 사람도 회사도 핵심역량을 강화하는데 필요하다면 외부에서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 불필요한 사업이나 자산은 과감하게 매각한다.

이 과정에서 그룹의 외형은 축소됐다. 화학·방산 등 비주력 사업을 롯데와 한화에 넘겼고, 직원수도 줄었다. 지난 1년 사이에 삼성전자(3183명 감소), 삼성물산(1810명 감소), 삼성SDS(719명 감소), 삼성SDI(1803명 감소), 삼성중공업(2356명 감소) 등이 상당수 직원을 내보냈다.

반면 삼성전자의 경우 애플, IBM, 보다폰, 인텔, 코카콜라 등 글로벌 기업 출신 임원을 영입했다. 스마트폰과 TV, 사물인터넷 등의 사업을 이끌 인재를 확보한 것이다.

삼성은 소규모 M&A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국내 최대 규모인 하만 인수로 이 공식을 깼다. 올해 10월 말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이사회에 합류한 이후 나온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하만 인수가 공격적인 경영을 예고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입지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도요타와 폴크스바겐 같은 경쟁자들이 품질 문제로 곤욕을 치른 사례를 거울삼아 품질 경쟁력 확보와 미래형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을 계기로 고급차 시장 개척에도 나서고 있다.

현대차는 2014년 9월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 입찰 당시 경쟁자인 삼성을 따돌리기 위해 10조5500억원이라는 금액을 써내 재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현대차 주주와 노조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과도한 금액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사기업이나 외국 기업이 아닌 정부 땅을 사는 것이어서 결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고 말했다.

서울 삼성동 현대자동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의 완공 후 예상 모습.

서울 강남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이라는 점에서 현대차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정 회장은 올해 7월 삼성동 GBC 공사 현장을 찾아 “GBC는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100년의 상징이자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GBC 건물은 105층 규모로 업무시설과 전시시설, 호텔 등이 들어선다. 2021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지난해와 올해 자동차 판매가 부진했지만 현대차그룹은 기업의 핵심자산인 인재 확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실제 현대자동차(1734명 증가), 현대모비스(485명 증가)는 최근 1년 사이에 직원수가 늘었고, 기아자동차는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는 올 상반기 연구개발(R&D) 투자 비중도 지난해 상반기보다 확대했다. 현대차는 올 상반기 R&D에만 1조55억원을 쏟아부었다. 매출액 대비 2.1% 수준이다. 이 회사는 친환경차,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나서, 지난해 상반기(2.0%)보다 R&D 투자 비중을 늘렸다. 기아차의 올 상반기 R&D 투자 비중도 2.9%를 기록해 지난해 상반기(2.6%)보다 높아졌다. 현대모비스의 경우도 그 비율이 1.7%로 지난해 상반기(1.57%)보다 공격적인 R&D 투자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 재계 쌍두마차 ‘선의의 경쟁’ 하지만 ‘협력’은 글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성과 현대차는 과거 한때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주력 분야가 달라 정면 경쟁을 하거나 협력한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현대차가 삼성전자가 인수한 하만의 고객사이기에 이제는 사업적인 교류가 불가피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겉으로는 현대차가 내색하지 않지만 삼성이 자동차부품 사업에 뛰어든 것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라며 “하만이 현대모비스와 경쟁하는 관계인데다 현대차의 정보가 유출되는데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11월 21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전자와 하만의 미디어 브리핑에서 손영권 삼성전자 사장(왼쪽), 디네쉬 팔리월 하만 CEO(가운데), 박종환 삼성전자 부사장(오른쪽)이 손을 맞잡고 협력을 다짐했다.

이에 대해 최근 방한한 디네시 팔리월 하만 최고경영자(CEO)는 “우리 목표는 스마트 자동차 시대에 1차 솔루션 공급업체가 되는 것”이라면서 “현대차를 포함한 많은 고객사를 방문했고, 완성차 사업에 진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하만은 궁극적으로 IT, 디스플레이 등의 기술을 접목해 앞으로 펼쳐질 자율주행차 시대에 대비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하만이 가진 오디오 브랜드와 삼성의 TV·가전제품도 접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병태 KAIST 교수(경영학)는 “자동차 산업은 진입장벽이 높고 변화속도가 느려, 자율주행차 시대에 대한 준비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중하게 하고 있다”면서 “삼성과 현대차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최고의 기업을 선택해 협력하고 있다”고 했다.

신동엽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애플이 제품의 품질을 위해 미국 반도체기업 대신 경쟁사인 삼성과 협력하는 것처럼, 삼성과 현대차도 더 큰 시너지 효과와 성장을 위해 개방적인 태도로 협력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