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층짜리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삼성은 지금 초가집 수준이다. 소프트웨어(SW)의 큰 그림을 그리는 아키텍처(architecture·건축)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삼성이 자사(自社)의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自我批判)을 쏟아냈다. 삼성은 5일 오전 사내 방송을 통해 전 계열사에 '삼성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白書)'라는 약 20분짜리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지난달 21일 방송한 1부 '불편한 진실'에 이은 후속작 '우리의 민낯'이다.

삼성은 '소프트웨어 개발의 현주소'를 임직원과 외부 전문가의 입을 통해 과감하게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큰 그림을 그릴 줄 모르니 설계가 엉망이다. 설계가 잘된 소프트웨어는 중간에 새롭게 바꾸거나 확장하기 쉽지만 기초 설계가 부실하니 작은 개선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소프트웨어의 초기 설계가 부실한 상태에서 '땜질'식 처방이 쌓이다 보니 잘못된 부분을 찾기도 어렵고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상사(上司)가 만든 코드를 사원에게 검토하라고 하면 사원은 능력이 있어도 '이게 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가 없다", "직급이 올라가면 조직 관리 부담 때문에 전문성 있는 소프트웨어 인재로 클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구글·페이스북과 같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어느 IT(정보기술) 기업보다 많은 약 3만2000명의 소프트웨어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항상 소프트웨어 역량이 약점으로 꼽힌다.

지난 10여년간 소프트웨어 인력 확보에 매진해 양(量)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질(質)적인 성장은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구글의 소프트웨어 인력은 약 2만3000명이다.

삼성은 그룹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실력을 자체 검증해 보니 절반가량이 '초급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인터넷기업인 구글의 입사 시험을 치르면 1~2%만 입사가 가능한 수준이며, 구글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는 상위 6% 정도밖에 안 된다고 진단했다.

삼성은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떨어진 주요 원인으로 '경직된 기업 문화'를 꼽았다.

위계질서가 강한 삼성의 사내 문화가 직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창의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직원들끼리 직급 대신 '○○님'으로 호칭을 바꾸고 반바지도 허용하는 사내 문화 혁신에 나선 것과 맞물리는 대목이다. 이 같은 삼성의 변화는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반성에 삼성 안팎에선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 스스로 치부를 드러낸 용감한 결정'이란 호평(好評)부터 '회사의 책임은 도외시하고 직원 비판만 한다'는 불만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하드웨어 중심으로 성장한 삼성이 앞으로 소프트웨어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라며 "외부의 시각에선 자아비판이 '긁어 부스럼'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를 계기로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를 위한 과감한 변화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삼성은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확산시키면서 고급 소프트웨어 인재 육성을 위한 '전문가 트랙' 신설, 실력 중심의 승진 체계 도입 등 다양한 제도 개편에 나서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