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상담을 받기 위해 지난 4일 시중은행 지점에 들른 진모씨(42)는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은행 관련 어플리케이션만 잔뜩 깔고 나왔다. 금리가 생각보다 높아 뒤돌아서 나오려고 했는데 은행원이 어플을 설치해 달라고 읍소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출시된 멤버스 어플과 알림 어플, 메신저 어플 등 5개 가량을 자신의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했다. 은행원은 진씨가 머뭇거리는 듯한 인상을 보이자 잠시 휴대폰을 건네달라고 하더니 어플 5개를 순식간에 깔았다. 진씨는 “은행원이 ‘살려달라’고 했다”면서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다짐하길래 그냥 설치했다”고 말했다.

KEB하나 국민 신한 우리 등 주요 시중은행이 모바일 플랫폼 강화 전략에 나서면서 은행원들이 실적 경쟁에 고통받고 있다. 시중은행 대부분은 기존 은행 입출금 어플 외에 알림, 메신저, 플랫폼 어플 등을 갖고 있다. 어플이 가장 많은 A은행의 경우 뱅킹과 알림, 금융센터, 중금리대출 등 7개의 어플을 출시해놓은 상태다.

문제는 시중은행 대부분이 은행 관련 어플에 은행원 사번을 넣게 하고, 실적을 체크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일부 은행원들은 어플 다운로드 실적 때문에 주말마다 놀이공원, 교회, 극장, 콘서트장 등으로 원정을 다니고 있다.

그래픽=이진희 디자이너

여기에다 주요 시중은행이 한꺼번에 멤버스 어플을 내놓으면서, 은행원간 경쟁이 더욱 거세지게 됐다. 멤버스 어플은 해당 금융그룹 계열사를 이용하면 그 이용량에 맞춰 현금화가 가능한 포인트를 지급하는 어플이다. 지난해 10월 하나금융그룹이 하나멤버스를 출시했고, 최근 신한금융과 우리은행이 각각 신한 판(FAN) 클럽, 위비멤버스를 내놓았다. KB금융도 이르면 이달 내 멤버스 어플을 출시할 예정이다.

◆ 하나멤버스 가입자 500만 돌파…우리·신한도 연내 500만명 목표

5일 금융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은행원들에 각각 인당 200개의 할당을 내렸다. 최근 가입자 500만명을 돌파한 하나금융의 경우 현재는 각 지점을 통해 따로 실적 목표치를 배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금융은 연내 800만명 돌파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신한과 우리는 각각 500만명 가입자를 목표로 한 상태다.

할당을 내리는 방식이다보니 현장에서는 불평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은행원은 자비로 알바를 고용하고, 적지 않은 행원이 주말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시간외근무를 하고 있는 상태다.

일부 영업점은 지점장이 주말 근무를 사실상 지시해놓고 시간외근무를 인정하지 않아 은행원들의 불만이 거센 것으로 전해졌다.

한 은행 관계자는 “처음에는 어플을 설치하면 1000원을 지급했고 이후에는 커피 이용권을 주더니 최근엔 영화표, 식사권 등 비교적 고가의 경품을 내걸고 있다”면서 “어플을 깐다고 당장 은행에 수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데 과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하나멤버스(왼쪽)와 신한판클럽(오른쪽), 위비멤버스(아래) 어플 화면

“금융상품이 아니라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금융당국도 최근엔 경고에 나서고 있다. 한 시중은행 지점은 모 고등학교 앞에서 등하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플을 깔게 하다가 교사들의 항의를 받고 철수했다. 이후 교사들은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했고, 금감원이 해당 지점에 구두 경고를 내렸다.

◆ “기반 확충 때까진 할당 어쩔 수 없어”

각 은행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면 어느 정도는 강제적으로 기반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 은행 관계자는 “원래 은행 상품이든 모바일 플랫폼이든 처음에는 정체된 듯 하다가 어느 기점까지 모이면 그때부터 이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곤 한다”면서 “일단은 사용 기반을 넓히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최근 실제 이용량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면서 “분명히 유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은행원이나 노조측은 지나친 실적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시중은행 노조 관계자는 “멤버스는 현금화나 다른 유통그룹 포인트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 분명히 경쟁력이 있는데도 실적 경쟁만 강요하고 있어 은행원들이 장점을 설명하기보단 막무가내로 깔아달라고 읍소하기만 하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나서든 노조가 나서든) 과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