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을 창업한 서성환 선대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노조가 시작한 25일간의 본사 점거 농성이 끝난 1991년 어느 날,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자인 고(故) 서성환 선대회장과 그의 아들인 서경배 당시 상무는 마주 앉아 있었다. 창사 40여년 만에 가장 큰 위기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부자(父子)는 녹차를 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경배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노조 파업은 회사 역사상 최대 위기이자 전환점이었습니다. 자금 사정이 어려웠기에 정말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회장님과 저는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화장품 외길은 당신의 꿈이고 삶 자체여서 화장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1970, 80년대 상당수 대기업처럼 25개까지 늘려놨던 계열사를 정리하고 '화장품 외길'로 돌아왔다. 이는 1990년대 말 대한민국을 강타한 외환 위기에 앞서 부실(不實) 계열사를 먼저 털어내는 선제 구조 조정 효과를 냈다. 이후 20여년간 아모레퍼시픽은 성장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항하고 있다. 한방(韓方) 화장품과 쿠션 같은 혁신 제품을 내놓으면서 한국 화장품을 전 세계에 확산하는 'K뷰티'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섰다.

아모레퍼시픽이 창립 70주년을 맞아 출간(出刊)한 창업자 서성환 선대회장에 대한 평전(評傳)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서는 지금 꽃피고 있는 K뷰티가 1930년대부터 장기간 기초가 다져진 뿌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모레퍼시픽은 1932년 경기도 개성에서 서성환 선대회장의 어머니인 고(故) 윤독정 여사가 문을 연 창성상점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이후 서 선대회장은 1948년 서울 남창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태평양화학공업사'로 사명(社名)을 바꿨다.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은 1932년이 아닌 1945년을 창립 연도로 정하고 있다. 서경배 회장은 "광복(光復)으로 자유인이 된 이후가 진정한 창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구 개발에 목숨 걸다

평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서 선대회장이 연구소 투자와 기술 개발에 집요할 정도로 집착했다는 점이다. 그는 1954년 국내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 당시는 약 6.6㎡(약 2평) 공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 선대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연구소를 키웠다. 그는 1990년대 초반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연구소를 오히려 확장 이전(移轉)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지금 세계 6개국에서 연구진 500여명을 두고 연구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소속 연구원의 논문이 '사이언스' 같은 국제적인 전문 과학 저널에 실릴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종업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서성환(가운데)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선대회장. 사진은 1960년대에 촬영됐다.

한 가지 연구 주제에 대한 집착은 수십년간 이어지기도 했다. 현재 K뷰티의 첨병 브랜드 중 하나인 한방 화장품 설화수(雪花秀)는 1997년 출시됐다. 그에 앞서 서 선대회장은 인삼을 이용해 만든 화장품을 1966년에 처음 내놨다. 인삼 판매의 본고장이었던 개성에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인삼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인삼 관련 자료가 부족해 성분 분석과 추출 같은 기초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를 제품화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나온 결정체가 '설화수'이다.

한번 정한 목표는 수십년 동안 지속

한번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일이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않는 것도 돋보인다. 아모레퍼시픽은 1992년 중국 진출을 시도했지만, 본격 준비는 한참 전부터 했다. 특히 서 선대회장은 일제(日帝)강점기인 1945년 1월 징병돼 중국에 끌려가 1년 넘게 지내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있었다. 특히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6개월 동안 중국에서 살아야 했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서 선대회장은 선진국 화장품 기업들이 선점하고 있는 대도시가 아니라 중소도시인 선양(瀋陽)을 첫 진출지로 선택했다. 이는 아모레퍼시픽이 학습을 거쳐 중국에 착근(着根)하는 계기가 됐다. 서 선대회장은 1980년대부터 "곧 중국이 개방될 것"이라며 철저한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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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진출 꿈도 마찬가지다. 아모레퍼시픽은 1964년 이미 오스카라는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어 수출을 시도했다. 1984년 미국 LA 지사를, 1990년에는 프랑스 법인을 세웠다. 기술력의 열세와 낮은 브랜드 인지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이때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수출과 해외 진출을 계속 함으로써 최근의 'K뷰티 열풍'을 이뤄냈다. 차(茶) 재배에 대한 열정에서도 이런 DNA는 드러난다. 서 선대회장은 사라져버린 차(茶) 문화를 되살리자는 생각으로 1979년부터 제주도에서 차 재배를 시작했다. 녹차 사업 자체로 이익은 내지 못했지만 아모레퍼시픽은 끝까지 녹차를 놓지 않았다. 아모레퍼시픽은 결국 1989년 세계에서 최초로 녹차 성분을 이용한 화장품을 만들었고 지금 제주도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차밭은 선대 회장의 뜻대로 관광객이 차 문화를 즐기는 명소(名所)가 됐다.

위기를 기회로

아모레퍼시픽은 항상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성장해 왔다. 1951년 서 선대회장 등 일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는 먹고 잘 장소를 구하자마자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식물성 원료인 '피마자유'로 만든 한국 최초의 식물성 포마드 'ABC 포마드'였다. 당시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완전히 바뀌면서 이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없어서 못 파는 인기 상품이 됐다.

1960년대 서울 영등포에 국내 최대 화장품 공장을 지으면서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서 선대회장은 방문판매 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해 오히려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기회로 삼았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선대회장님은 한평생을 화장품과 사시다 가신 분"이라며 "그 뜻을 이어서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