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글로벌 경제의 큰 축이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대기업들이 효율성으로 대변되던 근대적 물질 세계를 벗어나 탈물질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진원지는 애플, 구글, 홀푸드마켓 등 창조적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미국이다. 애플은 "다르게 생각하자(Think Different)", 구글은 "일하며 즐기자(Work and Play)", 홀푸드마켓은 "경영하며 공헌하자(Balance Business with Social Impact)" 캠페인을 통해 수익과 이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업 문화를 강조한다.

그 어느 나라 기업보다도 물질주의가 팽배했던 미국 기업들이 가치중심적 사고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그러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이코노미 질서 아래서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한국 기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가장 손쉬운 접근은 미국 경제의 변화를 선도하는 가치중심적 기업의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대표적 포스트모던 기업인 애플을 필두로,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기로 유명한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드제리스, 화장품 회사 더바디샵, 유기농 슈퍼마켓 홀푸드마켓까지, 이 기업들 사이에는 창업자가 히피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히피문화에 심취해 마약을 복용했던 젊은 시절을 공공연하게 자랑할 정도로 히피 정체성이 강했다. 잡스의 생생한 진술이 담긴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에는 잡스가 빌 게이츠를 시야가 좁은 ‘공부벌레’로 표현한 대목이 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유전자에는 인간애와 인문학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마약과 히피문화가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히피문화는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함께 폭발적으로 출현한 대항운동이었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주류 문화와 기존 사회질서에 저항하고, 사랑·평화·자유를 추구하며, 물질 문명보다는 정신적 가치와 인간성 회복에 무게를 두었다. 이와 같은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는 우드스톡으로 대표되는 실험적 록 음악과 패션, 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적 활동을 통해 분출되었다. 기성 사회가 제시하는 틀에 박힌 가치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가치와 의미에 따라 개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히피 출신의 기업가가 소비 활동을 통해 의미 있는 경험을 구축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던 소비자의 욕구를 발 빠르게 파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기업인의 사례로만 히피 자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히피문화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즈 과학전문기자 존 마코프(John Markoff)는 2006년 저서 『도마우스가 한 말(What the Dormouse Said)』에서 PC (Personal Computer) 산업의 발전이 히피문화가 대표하는 1960년대 대항문화(Counter Culture)에 기인했다고 주장한다. IBM, DEC 등 기존 미국 동부 메인프레임 컴퓨터 산업과 비교할 때, PC 산업은 태생적으로 저항적 성격을 지닌다.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대기업의 권력을 상징한다면, 개인이 독립적으로 정보를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PC는 자유와 탈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항정신과 맞닿아 있는 PC 산업이 그 문화의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마코프의 책에 따르면 마우스, 이메일, 워드 프로세스 등을 개발한 더글러스 엥겔바트 (Douglas Engelbart)를 비롯해 실리콘밸리 개척에 일조한 많은 기술자와 기업인들이 대항문화를 추종했다.

모든 국가가 부러워하는 미국의 IT산업은 이처럼 대항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스티브 잡스 등 실리콘밸리를 세우고 변화시킨 혁신가들은 1960년대 대항문화의 영향을 받아 투철한 이단아 정신으로 기존 비즈니스의 질서를 거부하고 파괴했다. 1960년대의 대항문화가 창조적 파괴를 통해 기업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히피 자본주의'로 진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동력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우리나라에도 히피와 같이 한 세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운동세력이 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의 좋은 예다.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은 386세대는 새로운 가치관과 진보 정신으로 민주화와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386세대는 적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1999~2000년 벤처 붐을 타고 나타난 386세대 창업자들은 네이버, 다음, 엔씨소프트, 넥슨 등 한국의 인터넷과 게임 산업을 주도하는 굴지의 기업을 키웠다.

그러나 386세대가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개척했는지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아직 단정하기 이를지 모르지만, 대부분 주류 문화를 수용한 386세대 기업들이 이제 와서 문화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자본주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잡스는 자신이 히피였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했는데, 과연 한국에서 자신이 운동권이어서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기업인이 있는가.

386세대의 진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청년 세대에게서 본다. 물론, 히피 운동과 같은 대항문화를 체험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혁신과 창조를 이끌 이단아 세력을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가 개성, 창의성, 다양성, 삶의 질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관건은 현재 소비 중심으로 차별성을 추구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좀 더 분발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개성, 차별성, 변화에 대한 욕구를 소비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생산과 창업 활동을 주도하는 기업가 정신으로 분출한다면 머지않아 한국에도 다양성과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출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