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조짐을 우려하면서 정부가 기업에 임금 인상을 촉구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여력이 없다"며 속속 임금을 동결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지난 4일 한 강연에서 "기업 소득은 늘지만 가계소득은 늘고 있지 않다"며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고 말했다. 최 부총리의 이 발언은 삼성과 정유업체 등 재계에서 임금 동결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나왔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말 노사협의회를 통해 임금을 동결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지난 6일에는 삼성SDS·삼성전기·삼성디스플레이도 임금 동결 대열에 합류했다. 경영난을 겪었던 삼성엔지니어링은 사장을 포함한 임원 57명이 지난달 급여를 반납하기도 했다. 국내 최대 제조업체인 삼성전자가 임금을 동결한 것은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6년 만이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 실적 부진이 다른 전자 계열사 실적에도 연쇄적으로 여파를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저유가의 여파로 대규모 적자를 낸 정유업계는 일찌감치 올해 임금을 동결했다. 작년 말 SK이노베이션이 임금을 동결했고 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도 뒤를 따랐다.

현대차 등 노조 세력이 강한 일부 기업은 올해 임금인상 협상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SK·CJ·LS 등 아직 본격적인 임금 협상에 들어가지 않은 기업도 대부분 임금을 동결하거나 소폭 인상하는 데 그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의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지난 5일 4000여개 회원사에 "올해 임금은 국민경제생산성을 고려해 인상률을1.6% 안의 범위에서 조정하라"며 최 부총리의 요청에 역행하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이 권고안은 지난해 권고안(2.3%)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더구나 이번 권고안에는 통상임금 확대, 60세 정년의무화 등 제도 변화에 따른 자연 인상분까지 포함돼 있어 사실상 동결이나 마찬가지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장은 6일 기자간담회에서 "수입은 늘지 않는데 지출이 늘면 사람(직원)을 내보낼 수밖에 없다"며 "2007년 감시·단속적 근로자의 최저임금 적용 후 아파트 경비원의 대량 해고 사태가 벌어진 사례가 있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높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옳은 방향"이라며 "최저임금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의 부담은 덜어주고, 여력이 있는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져야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