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도 되지만, 지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KBS 3·1절 특집 드라마 '눈길(2부작)'의 극본을 맡은 유보라(37) 작가와 연출자 이나정(37) PD는 낮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눈길'은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첫 한국 드라마. 2월 28일 방영된 첫 회는 시청률 5.4%(닐슨코리아)로 일단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 2013년 미니시리즈 '비밀'을 성공시키며 주목받은 유 작가는 위안부 이야기를 "오랫동안 품어온 소재"라고 말했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으니까요. 자라는 아이들도 꼭 알아야 하는 역사이고요."

드라마 ‘눈길’에서 주연을 맡은 10대 배우 김새론(왼쪽)과 김향기는 “또래 친구들도 이 드라마를 보고 아픈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15세 소녀 종분(김향기)과 영애(김새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평범한 두 시골 소녀는 태평양전쟁의 광풍에 휩쓸려 중국에 있는 일본군 막사로 끌려간다. 일제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가 위안부로 끌려온 영애는 가혹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종분의 도움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한국인이라면 고통과 분노 없이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자극적인 장면은 최대한 배제하고 은유와 암시를 활용했다. 10대인 주연 배우들이 혹여 연기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배려한 것이다. 대신 디테일을 살렸다. 이 PD는 "위안부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느끼게 하려면 그 시대를 제대로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위안부들이 입었던 옷, 쓰던 물건 등 소품 하나하나를 일본 자료까지 뒤져가며 새로 만들었다.

두 소녀의 이야기가 후일 80대 할머니가 된 종분(김영옥)이 성매매를 하는 10대 소녀 은수(조수향)를 도와주게 되는 이야기와 맞물려 진행되는 것도 이 드라마의 특징. "위안부 이야기가 과거의 역사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삶의 바닥에 있는 여성들은 말 못 할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도 함께 얘기하고 싶었어요."

위안부 시절의 악몽을 혼자 품고 살아온 종분은 은수에게서 오래전 자신을 구하고 죽은 영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돕기 위해 애쓴다. 종분이 은수에게 건네는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말은 그를 구했던 영애의 유언이자,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모든 사람이 투사가 될 순 없지만, 주변 아픈 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는 있어요. 우리에겐 아직 그렇게 손잡아줄 할머니들이 많이 남아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