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 해설강의에서 흥남철수 직전 한국전쟁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설민석 태건에듀 대표

“중국 하면 삼국지! 지략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 다 필요 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인! 해! 전! 술! 입니다. 속설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는 거죠.”

화면 속 강사는 열변을 토한다. 보고 있으면 어느새 역사 강의에 빠져든 수강생이 된다. 10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국제시장'. 그 역사적 배경의 진실을 설명한 '해설 강의 동영상'의 일부다. 강사는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한 6·25 당시 흥남부두 철수 장면의 전사(前史)를 설명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전세를 만회한 미군이 북진하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되밀려 내려오게 됐다는 얘기다.

사극 시대. 책도 TV도 드라마도 역사 바람이 거세다. 요즘은 개봉되는 역사 영화에 온라인 해설 강의까지 별책 부록처럼 딸려나오면서 뜻밖의 주목을 받고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부터 ‘관상’, ‘역린’, 최근의 ‘상의원’…. 지난해 17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명량’에도 해설 동영상이 감초처럼 따라붙었다. 영화를 감상하기 전이든 보고 난 후든 관객들 사이에서는 ‘필수 코스’가 되다시피 했다.

영화 '명량' 해설강의 속 설민석 태건에듀 대표

역사 강의 동영상이 영화 못지 않은 인기를 끄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명량’ 해설 편만 봐도 그렇다. 설명이 필요 없다. 임진왜란과 명량해전의 특이점, 충무공의 전법 같은 것들이 ‘단권 노트’처럼 일목요연하다.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 영화의 줄거리나 숨은 포인트를 놓치기 쉬운 관객들에게 이처럼 요긴한 도우미가 없다. 특수효과까지 입힌 이 동영상은 네이버 조회 수 140만건 이상을 기록했다.

영화에 나오는 역사 속 인물들은 다 달라도 해설 동영상 속 주인공은 한 사람이다. 설민석(45). 이제는 ‘국민 역사 선생’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떴다. 대치동도 노량진도 아닌 충무로에서 목하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다. 직함은 이투스 대표강사 겸 태건에듀 대표이사. 20년 전 보습학원 강사에서 출발한 그는 이제 대형 수험학원의 대표 역사 강사로도 모자라, 아예 한국사 전문 교육기업까지 차렸다.

정작 자신은 “지금 받는 관심이 너무 과분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행복한 비명처럼 들리는데 표정을 보면 연기 같지만은 않다. 사실, 강의 경력은 20년차 왕고참이지만 지금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건 불과 3년도 안 된다.

사연이 궁금했다. 듣고 보니 그의 역사 강의보다 더 흥미진진한 개인사(그야말로 his story)가 긴 꼬리를 숨기고 있었다. 그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가 0419인 이유, 아버지의 컬러링이 애국가인 사연, 그리고 그가 오늘날 각광받는 에듀테인먼트의 선구자로 뜨게 되기까지….

그 라이브 강의 같은 인터뷰가 벌어진 곳은 서울 강남의 한 스터디룸. 지난 14일 저녁이었다.

설민석 태건에듀 대표

초면에 인사를 건넬 때만 해도 목소리가 예상보다 작았다. 하지만 답변 순서가 되자 딴판이 됐다. 성조부터 달라졌다.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댈 때는 마치 감독의 ‘액션’ 지시라도 받은 것 같았다. 손동작이 커지고 표정이 살아 움직였다. 20년차 입시 강사의 내공이 저런 건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요즘 인기를 실감하나?

주변에서 많이들 알아봐 주시고 하니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준비해서 다른 (역사) 지식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책임이 막중해진 것 같다.

-수험생 강의 외에도 활동이 꽤 다양한데.

기본적으로는 수강생들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영화 해설 강의도 했고. 기획재정부나 장애인정책국, 통일부 같은 정부 부처 의뢰도 받아서 강의했다. 강연도 다니고 해외 교포 자녀를 대상으로 한 강의도 했다. 세상 말로 토하는 줄 알았다. 특히 작년 영화 '명량' 이후부터 너무 바빴다. 다행히 지금은 조금 정신차리고 있다. 최대한 본분에 충실 하려고 하고 있다.

-사극 영화에 붙는 동영상 역사 강의가 인기다. 첫 영화는 뭐였나?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처음이었다. 그 뒤 '관상', '역린', '명량' 등으로 이어졌다.

-본업은 아니었을 텐데, 어떤 계기로 그런 일을 하게 됐나?

원래 나는 수능, 입시 전문가다. 강의 시작한 지 올해로 20주년이다. 원래 학생들 대상으로만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2012년 MBC '무한도전' 작가한테서 출연 의뢰가 들어왔다. (무한도전 출연진 중 한 명인) 하하의 역사 선생님으로 출연해 달라는 거였다. 그땐 방송의 파급력을 몰랐다. 강의 때문에 바빠서 텔레비전을 잘 못 보니까. 방송에 나가도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여겼다. 녹화 때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지금 돌아봐도 아주 침착하게 강의를 한 것 같다. 그렇게 유명한 프로그램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는 못했을 거다. 그게 나간 뒤로 영화 해설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동영상 해설을 한 영화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광해, 왕이 된 남자' '관상' '역린' '국제시장'의 해설 강의를 찍었다. 영화 '상의원'은 정통 역사물이 아니라 설정만 빌려온 거여서 문답 형식으로 진행했다. 사실 '상의원' 제의를 '국제시장'보다 먼저 받았다. 막상 시나리오를 보니 설정만 역사에서 빌려온 것 같아서 고사했었다. 하지만 계속 부탁이 와서 해설 강의 대신 출연 배우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형식으로 제작했다. 국제시장은 처음 제안을 받자마자 현대사라는 점이 너무 반가웠다. ‘현대사인데 해야지’ 싶어서 선뜻 하겠다고 했다.

-원래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나? 꿈이 뭐였나?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운명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점 찍어진 운명이랄까.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국사가 지겨웠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장난도 좋아하는 골목대장에 개구쟁이였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남달랐다. 아버지(설송웅 전 국회의원)께서 4·19 혁명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한 학생과 시민 대표 중의 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그 사건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 전화번호 뒷자리도 0419, 아버지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도 4190이다. 아버지 컬러링은 애국가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 역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역사적인 스토리가 있는 집안인 거다. 그래서 역사 의식 자체는 마음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 꿈도, 막연하긴 했지만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 ‘사극 연출가’가 되고 싶었다. 뮤지컬 ‘명성왕후’를 만든 윤호진 감독이나 사극 ‘용의 눈물’을 연출한 김재형 PD처럼 되고 싶었다. 형태는 정극이건 뮤지컬이건 상관 없었다. 우리 역사를 작품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다. 외국인과 해외 동포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도 연극영화 전공으로 진학했다.

지금 어떻게 보면 그 꿈을 이룬 셈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사극 해설 동영상을 만들어 대중에게 알리고 있으니까. 해설 강의 동영상에 영문, 중문 자막도 넣어 외국인에게도 알리고 있다. 영화 ‘명량’이 미국에서 개봉할 때 내 강의 동영상도 함께 가져갔다. 요즘 해외 교포 자녀들에게 역사 강의로 재능 기부도 하고 있다.

-요즘 같은 영상 시대에 꼭 맞는 재능을 타고난 것 같다.

사실 ‘여기(언론과의 인터뷰 자리)가 내가 있을 자리가 맞나’ 싶다. 역사 전문가라면 역사학자나 교수님도 많지 않나. 나는 그저 학원에서 학생 가르치는 사람인데. 나름대로 자부심은 있지만(웃음) 이렇게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인터뷰까지 하고. 굉장히 부담되기도 하고 어깨가 더 무겁다. 그래서 요즘은 ‘이거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 방법이 없다’ 그러고 있다.

-대학 때는 연극영화를 전공했다. 어떻게 강사 일을 하게 됐나?

학원강사는 먹고 살기 위해서 했다. 군대 다녀와서 대학에 갔는데, 집에 손 벌리기가 민망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부터 세차장, 신문배달, 우유배달, 산타클로스, 어린이카페 보모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그러다가 1995년에 중학교 보습학원에서 사회과목 선생님으로 일하게 됐다. 뜻밖에 학생들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그때가 스물여섯 살 때였다. 그러니까 올해로 딱 20주년이 됐다.

강의 반응이 좋고, 초롱초롱한 학생들 눈을 보니 내 마음도 달라졌다. 비록 보습학원 중간고사 대비반이었지만, 내가 더 공부해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책을 보며 공부를 하다 보니 역사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3년 정도 같은 학원에서 강의하면서 역사 강사가 내 천직이란 걸 느끼게 됐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역사교육을 더 공부했다.

학원에서 처음으로 강의했던 과목이 한국사였다. 통합 교육 과정 때는 윤리나 지리 같은 과목을 함께 가르치기도 했다. 그 뒤 7차 교육 과정에서 선택심화형으로 바뀌면서 친정인 역사로 돌아왔다.

-인터넷 강의에서 재미있는 수업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런 건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강의를 하면서 ‘참교육’이 뭘까를 두고 나름대로 많이 고민했다. 교실에서 칠판과 분필만 사용하는 이론 교육도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수업은 그렇지 않다. 특히 역사는 답사가 아주 중요하다. 대학교 학부생들의 경우 한 학기에 두 번 이상 역사 공부를 위해 현장 답사를 간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험생은 그런 기회가 적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더 생생하게 전해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때 인터넷 강의(이른바 ‘인강’) 시대가 열렸다. 그래서 생각한 거다. 그러면 내가 직접 밖으로 나가자. 나가서 촬영해서 보여주면 되지 않나. 이 땅, 삼천리 방방곡곡 다 밟고 다니겠다. 그걸 촬영해서 뜨거운 역사 현장의 열기와 혼을 수험생에게 영상으로 보여주면 될 거 아니냐, 그렇게 시작했다.

이런 식의 강의는 내가 처음이었다. 요즘 분들은 명량이나 국제시장 같은 영화의 내 해설 강의에 나오는 특수효과를 보고 재미있는 시도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미 그전에 시도했던 현장 답사 영상, 역사 스페셜 다큐식 강의로 노하우를 쌓은 거다. 강의 동영상을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 덕분에 명량이나 국제시장의 해설 동영상편이 재미있게 나올 수 있었다.

내 학부도 남다르지 않나? 경쟁 학원 선생님들 보면 다 서울대 출신에 국사학과 나오셨다. 그런데 웬 연극영화과 출신이 나오니까. 처음엔 오해와 비판도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동안 쌓아온 게 결과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다. 학부 때 배웠던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요소들과 대학원 석사 때 전공한 역사 교육을 접목해서 ‘에듀테인먼트’란 걸 만들게 된 거다.

지루하고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 역사를 다이내믹하게 연출해서 보여주니 대중의 호응이 좋다. 그 전까지 그렇게 비판하던 분들도 이제는 격려하고 응원해주신다. 그리고 지금은 나도 ‘인강계’ 고참이 됐다. 이제는 많은 후배 선생님들이 찾아와서 “잘 보고 있다,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말도 하고. 정말 감사한 일이다.

-원래 무대 체질인가? 처음 강의할 때 떨리지는 않았나?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신다. 보습학원에서 대형학원으로 옮기면서 갑자기 수강생 수가 확 늘었는데, 떨리지 않느냐고. 사실 이건 좀 타고난 것 같다.(웃음) 처음부터 안 떨렸다. 대형 수험학원과 온라인 강의 시절 초반엔 인기 선생님들이 신인 선생님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자기들 수업 시간 중간에 신참을 투입해 5~10분 시범 강의를 하게 하는 거다. 그걸 보고 수강생들이 오는지 마는지 결정을 하게 되는데 내 경우는 사흘 만에 마감됐다.

사실 이건 좀 타고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사회 보거나 하는 게 즐거웠다. 게다가 인터넷 강의 시대가 열리면서 ‘물 만난 고기’가 됐다. 동영상 카메라가 생겼으니까. 선생님들 중에서는 갖고 있는 능력치가 100인데 카메라 앞에서는 떨려서 80, 50밖에 못 보여주는 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능력치가 100이라면, 카메라 앞에선 150, 200씩 보여줄 수 있다. 무대 체질을 좀 타고났다.

-맨 처음 강의 동영상을 촬영할 때는 어떻게 했나? 직접 찍었나?

직접 촬영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설명하는 선생이니까 촬영 팀을 이끌고 갔다. 이래 봬도 어릴 때 꿈이 연출가 아니었나. 프로듀서 성격이 아주 강하다. 현장에 가면 내가 감독이다. 카메라에 대고 “이 방향으로 찍어야 해” “이쪽 구도를 잘 잡아야 해” “이렇게 하면 재미 없어” 하면서 엄청나게 지시했다. 고생을 많이 했다. 그만큼 노하우가 많이 쌓였다.

-그게 영화 해설 강의 때 도움이 많이 됐겠다.

명량이나 국제시장 해설 강의를 보면 특수효과를 넣은 부분이 있다. 보신 분들은 그런 효과를 영화사 측에서 다 해주시는 걸로 알더라. 그게 아니다. 내가 자체 제작하는 거다. 영화 시나리오를 받으면 먼저 읽어보고 강의 컨셉을 잡는다. 강의 원고를 다 쓰고 난 뒤에 강의를 촬영한다. 그 다음 영상을 편집한다. 컷 자르고 특수효과는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직접 다 관여한다. 감독님과 함께 손을 본다. 특히 내 강의는 역사 전문가부터 일반 대중까지 전국민이 대상이니, 고증이나 검증에도 신경 쓴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해설 강의 동영상을 만드나? 순서가 어떻게 되나?

영화가 완성되기 한참 전에 해설 강의를 먼저 만들어 놓는다. 보통 영화 개봉 2주 전쯤에 해설 강의 동영상을 푼다. 이게 어떤 공식처럼 돼 있다. 명량이 그랬다. 여담이지만, 국제시장은 좀 달랐다. 영상을 미리 만들어 놓고도 공개를 못했다.

영화의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부터 ‘현대사 미화’ 같은 논란이 일었다. 현대사를 다룬 영화이다 보니 해석에 따라서는 민감한 부분이 많다. 영화는 실제로 그런 게 아닌데. 예고편만 나간 상태에서도 논란이 되길래 해설 강의 공개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

그래서 다른 작품보다 훨씬 늦게 영상을 풀었다. 해설 강의를 먼저 보고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1부는 개봉 전날 올렸다. 그나마 일찍 푼 거다. 논란거리가 많았던 2부는 개봉 후에도 못 올리다가 관객 수가 1000만명 거의 찍기 직전에 풀었다.

2부 강의에 왜 월남전을 뺐느냐는 지적이 있다. 해명하자면, 당연히 강의 내용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를 다루다 보니 영상 저작권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시각에 따라 민감한 반응이 나올 거란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편집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좀 많이 아쉬웠다. 앞으로도 현대사는 다룰 때 조심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찍은 영상 강의 중에 최고로 자부하는 게 있다면?

사실 모든 강의에 공을 많이 들여 다 자식 같다.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건 2012년에 나온 3부작 특별 강의 ‘독도’ 편이다. 고생을 많이 했다. 입도(入島)부터 쉽지 않았다. ‘독도에 가려면 3대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파도가 조금만 일어도 들어갈 수가 없다. 강의 스케줄로 바쁜 가운데 시간을 쪼개서 날을 잡았는데, 갈 때마다 배가 취소됐다. 네 번이나 실패한 끝에 독도 땅을 밟았다. 찡했다.

일본 입장도 듣고 싶어서 직접 시마네현까지 갔다. 독도에 대한 현지 중학생들 생각을 직접 인터뷰했다. 시마네현청도 방문하고 그곳 공무원과 논쟁도 벌였다. 마지막 편에선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과 ‘홀로아리랑’ 노래를 함께 불렀다. 함께 노래하는데 참 좋았다. 스케일도 크고, 고생도 많이 해서 기억에 남는 강의다.

-독도 편 찍을 때는 얼마나 걸렸나?

독도 입도가 워낙 어렵기 때문에 6개월 전부터 기획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예약 자체가 힘들었다. 선장님한테 사정사정해서 입석 비슷한 자리를 마련해 줘서 겨우 갔다.

전문 탐사 팀이 아니어서, 하루 종일 여기에만 매달린 건 아니다. 그래도 3부작인데 3개월이 꼬박 걸렸다. 독도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문제다. 그만큼 교육이 중요하다.

-이제는 다른 강사들이 강의 비법을 많이 궁금해 하겠다.

후배 강사들이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며 질문을 많이 한다. 하지만 '누구처럼'보다는 자기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게 맞다. 내 경우는 이런 재능을 타고났다. 쇼맨십이 좋은 거다. 그래서 강의할 때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고, 성대모사도 한다. 내 재능을 최대한 살려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재능이 있는 선생님도 많다. 그런 분은 자신만의 비법으로 강의를 끌어간다. 자기 모습이 아닌 걸 무작정 따라하면 결과가 나빠진다. 자기 자신을 살리는 게 최고의 비결이다.

-그래도 ‘나만의 강의 노하우’ 같은 것을 말해 줄 수 있나?

무엇보다 재미있는 강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구체적으로는 그림 그리기, 성대모사, 노래, 특수효과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다. 퇴계 이황이 16세에 즉위한 선조 임금의 스승이었다.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말만 들어도 어려운 게 성리학 아닌가. 어린애가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알아듣기 쉽게 성리학을 도식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태어난 퇴계 이황의 대표 상소문이 ‘성학십도(聖學十圖)’다. 그림 ‘도(圖)’자다.

어린 선조를 위해 퇴계가 그림을 그려서 가르쳤듯이,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국사를 그림으로 설명한다. 원래 내가 그림을 좀 그린다.(웃음) 인사동에서 직접 그린 민화로 전시회도 했다. 근현대사 가르칠 때는 역대 대통령 성대모사도 한다. 노래도 만들어 부르고. 또 온라인 강의에서는 특수효과를 사용해 집중도를 높인다. 요즘 사람들은 자막에 익숙하다. 과하지 않은, 적정 선에서 자막을 최대한 활용한다.

하지만 모든 강의의 바탕이 되는 건 풍부한 독서다. 학생들과 수업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건 적절한 비유다. 예수님 화법이 비유법이다. 주일에 일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필요하면 해야 한다”고 직설법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런 식이다. “너희가 주일에 자기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바로 피부에 와 닿는다. 이처럼, 설명할 때에도 비유를 많이 써야 한다. 비유의 바탕이 되는 게 지식이다. 특히 역사는 엉뚱한 것에 비유하면 오히려 헷갈린다. 역사서와 인문학 서적을 평소에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비유가 제때 나온다.

-대중 강의 때 수험생 강의와 다른 점이 있나?

학생들이 보는 내 모습과 대중 강의 때 내 모습은 많이 다르다. 수능, 공무원, 한국사검정능력시험 같은 입시 강의에서는 정말 웃기고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우스꽝스런 표정도 많이 짓는다. 칠판에 매달리고 성대모사도 하고, 심지어 벽도 탄다.(웃음) 반면에 대중 강의 프로젝트에서는 진지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건 나름대로의 교육 철학이다. 대중은 내 강의가 아니라도 웃을 수 있는 채널이 많다. 하지만 수험생들은 웃을 일이 없다. 강의만 보는 거다. 그래서 생각한 게 그래도 내게 (웃길 수 있는) 재능이 있으니, 웃게 해줘야겠다. 수험생이 나를 보면서 웃기를 바란다. 수강생들 후기도 올라온다. “선생님 덕분에 웃는다”고. 그게 큰 보람이다.

-요즘 사극 붐이 계속되는 것 같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최근 일본, 중국, 미국 같은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역사물 제작 편수를 비교한 표를 봤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겪은 역사적 특수성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정학적 요건도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고 남북이 분단돼 있다. 바다 건너 미국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실도 그렇지만 역사도 그렇다. 반만 년 동안 끊임없이, 1000번 이상의 크고 작은 침략을 받았다.

이런 민족적 사연이 우리 국민 가슴 속에 분명 살아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시대극을 찾는 게 아닐까. 영화,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는 수요가 없으면 절대로 공급을 못 한다. 일단 사극을 내놓으면 웬만큼은 하니까. 충무로에 “사극은 기본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이 전부 사극 마니아”라는 말도 한다. 그건 우리나라의 시련의 역사들이 국민들 가슴 속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거다.

-어떤 역사물의 경우 사실을 오도한다는 지적도 있다.

역사극이 ‘재미’를 너무 추구하다 보니 역사를 보는 관점이 한쪽으로 좀 치우치는 것이 아닌가, 그 점이 아쉽다. 드라마, 영화, 소설은 ‘재미’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재미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나리오의 기본은 극적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발전시키는 거다. 그렇게 하다보니 드라마, 영화, 소설은 늘 선과 악의 갈등으로 간다.

드라마 단골 소재인 사도세자와 정조 예를 들겠다. 극 속에서 대부분 정조는 훌륭한 사람이고, 사도세자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설정한다. 정조 편에 섰던 남인과 정약용, 채제공은 선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관됐던 서인은 늘 악역 전문 배우 몫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조 즉위를 반대한다. 제대로 된 대사도 별로 없다. ‘역사극’이라는 면에서 이해는 된다. 하지만 너무 치우치는 면이 있다.

정조의 즉위를 반대한 서인은 모두 나쁜 사람일까. 그렇진 않았을 거다. 앞서 연산군이라는 예가 있었다. 자기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 채 왕이 된 인물이다. 나중에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고 피바람을 불러왔다. 정조는 어떤가. 열한 살,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됐을 때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남들은 의심하지 않겠나.

게다가 사도세자는 (병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를 해치겠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역적의 아들(정조)이 명분상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나. 그 때문에 정조가 큰아버지인 효장세자 아들로 입적까지 했지만, 당시 성리학 사회에선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거다. 내가 서인이라도 반대했을 것 같다. 그런 반대편의 논리도 분명히 있다. 다양한 시각을 고루 비춰야 한다는 얘기다.

극적 재미를 찾다 보니, 결론부터 먼저 내리고 이야기를 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사도세자는 원래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짠다. 그런 후에 실록과 역사서에서 유리한 부분만 찾는다. 본래 미친 사람은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지 않나. 그런데도 사도세자가 정신이 들었을 때 한 행동을 기록한 부분만 따다 쓴다. 그것만 본 대중은 “아 정말 그렇네” 하고 재미있어 한다. 이런 접근은 진실을 호도할 수 있다.

특정 인물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역사물이 전반적으로 ‘드라마’를 꾸미려다 보니, 너무 한쪽 시각으로만 보는 게 아쉽다는 얘기다. 다른 쪽 시각도 보는 게 필요하다. 내가 제작자라면 영조 입장에서 왜 사랑하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루겠다. 아니면 서인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영화나 드라마. 이제 대중은 단순한 가십거리나 야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각과 재해석을 기대한다.

-역사물의 주인공이나 시대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좀더 주목을 받았으면 하는 인물이 있다면?

너무 많다. 무장 한 명, 문인 한 명을 뽑아보겠다. 일단, 백산 지청천(1888~1957) 선생님. 이 분이 누구냐,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다. 개교사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이고,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이고, 힘이 들면 드넓은 만주 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하자”고 하셨다. 독립군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선생님의 오른팔이었다. 민족주의자이며 무장으로 아주 훌륭한 분인데 조명을 잘 못 받았다.

문인으로는 같은 시기의 우사 김규식(1881~1950) 선생님이 있다. 이 분은 1918년 연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됐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해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할 대표가 된 거다. 한국 문제가 상정은 못됐지만 그 뒤에도 독립 외교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미국 가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 후원을 요청하는 활동도 했다. 충칭으로 가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했다. 해방 이후엔 좌우합작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분이다.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시기를 꼽는다면?

근대사. 대학원 전공도 근대사를 했다. 근대사는 전근대사와 현대사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근대사는 의미가 크다.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펴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문을 열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망국으로 갈 수도 있고 부국강병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중요하다.

결과적으로는 부국강병이 아니라 망국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이 부분이 더 집중적으로 연구돼야 한다고 본다. 보통 우리는 화려했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가장 치욕적이고 암울했던 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우리 땅에 그런 비극이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초석이 되는 연구다. 그래서 특히 근대사에 관심이 많다.

-정조와 이순신 같은 인물을 집중 탐구한 책도 냈다. 그 외 출간 계획은?

지금은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책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 왕 27명을 다 다루는 거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2077책이다. 일반인은 조선왕조실록을 다 볼 수가 없다. 지금도 편집한 책들이 나와있다. 잘 쓴 책도 많지만, 야사나 가십거리만 모은 책도 있다. 그래서 기존에 나온 책과 다른, 설민석만의 조선왕조실록을 만들고 싶다. 보통 ‘왕’ 하면 ‘옛날 사람’ 이렇게만 생각한다. 그들을 발가벗겨 우리 안방으로 초대하는 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인 면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

어른들이 삶의 교훈을 말씀하실 때 보통 손자병법이나 삼국지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신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면 희로애락과 에피소드, 교훈이 중국 고전 못지 않게 많다. 그런 걸 더 재미있게 접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해보려고 한다. 올해 안에 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진 않나?

질문이 잘못된 것 같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냥 생활 자체가 역사 탐구, 강의 계획에 집중돼 있다. ‘공부해야지’ 마음을 먹는 게 아니다. 오늘 인터뷰하러 오는 차 안에서도 모의고사 문제 풀면서 왔다. 밥 먹으면서도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찾아 보면서 먹는다.

-스스로 경계하는 게 있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두렵다. 매년 같은 내용을 강의하다 보니, 대사 외우듯 넋을 놓고 있어도 줄줄 나온다. 학원 강사들 사이에서는 ‘졸면서 강의한다’는 말도 있다.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지만 강의 내용은 그냥 자동으로 줄줄 나오는 거다. 그런 매너리즘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매년 교재를 바꾸고 문제도 갈고, 설명 방식도 바꾸고 있다. 그게 자신과의 싸움이다.

-또 다른 영화 해설이나 대중 강의 계획이 있나?

올해 개봉하는 사극 영화 두 편 정도 해설 제안이 들어와 있다. 아직 이야기 중이라서 구체적으로 말하긴 곤란하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는 KBS와 함께 인터넷·모바일로 볼 수 있는 10분 길이의 '십장생' 한국사 강의 열 편을 진행하고 있다. '십장생'이란 '십'분만 보면 '장'소를 불문하고 '생'생한 한국사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줄인 것이다.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대국민 역사교육 프로젝트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학생들 대학에 보내는 입시 전문가로 어느덧 20년 외길을 달려왔다. 대중을 만난 건 사실 2, 3년 정도밖에 안됐다. 나도 그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다. 대중이 이렇게까지 좋아하실 줄 몰랐다. 원래 입시설명회 하던 사람이 지금은 관공서, 군부대부터 해외 동포 역사교육 강의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만난다.

하지만 내 본분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수험생들은 (입시가) 사실 죽 고사는 문제가 달린 거니까. 그래서 대중 강연 가서는 이렇게 말씀드린다. “여기 계신 어머님이나 기업 임원 분들은 (내 역사 강의를 듣는 게) 지적 사치 아니냐”고. 앞으로도 (역사 강사로서) 본분에 충실할 것이다.

사실 지금 내가 받는 관심이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더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다.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남은 시간 동안 어렵고 지루해 하는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국민에게 알리고 싶다. 역사 대중화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시간 덜 자고 한 끼 덜 먹고, 남는 시간을 쪼개서 국민 여러분을 만나겠다.

◆설민석이 꼽은 역사극 베스트 3


①용의 눈물(김재형 PD 연출 대하드라마, 1996년 11월~1998년 5월 KBS1 방영)
줄거리: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부터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정권 창출까지를 그린, 제작비 160억원의 초대작 드라마. 국내 사극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 기록.
추천사: 배우 유동근이 열연한 태종 이방원 역은 실제 이방원보다 더 이방원답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사극 드라마다. 고증도 가장 잘 됐다고 본다.

②명량(김한민 감독의 영화, 2014년 7월 개봉)
줄거리: 임진왜란 6년(1597년)에 벌어진 '명량대첩'을 그렸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군 330척을 물리치는 과정을 그렸다.
추천사: 12척의 배로 대군을 물리친 것도 미스터리지만, 더 궁금한 게 있다. 이순신 장군이 "싸우자!"하고 나갔는데 혼자 나간 거다. 휘하 장졸이 아무도 안 따라 나섰다. 30분에서 한 시간 동안 혼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버텨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 부분을 김한민 감독이 그럴듯하게 잘 만들었다. 상상력을 동원해 관객이 벼랑 위에서 전쟁을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여담이지만 김한민 감독은 정말 이순신에 미친 사람이다. 대한민국에 이순신만 평생 연구하신 교수님과 선생님 몇 분을 제외하면 진정한 전문가라고 부를 만하다.

③(공동3위)관상(한재림 감독의 영화, 2013년 9월 개봉)
줄거리: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얼굴을 통해 앞날을 내다보는 천재 관상가가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 한 이야기를 그렸다.
추천사: 사극의 모범이라 해도 될 정도로 잘 만든 영화다. 역사를 알고, 결과가 어찌될지 아는데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고증이 잘 됐는데, 역사적 사실 사이에 감독의 발칙한 상상력이 유려하게 들어갔다. 그 연결고리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어색하지도 않다. 송강호의 마지막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③국제시장(윤제균 감독의 영화, 2014년12월 개봉)
줄거리: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살아온 주인공 '덕수'의 인생을 통해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변천사와 그 속의 인물들을 그린 영화.
추천사: 많이 울고 웃었다. 피부에 와 닿는 작품. 마음에 남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