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표시장치(LCD) 분야 세계 1위 대한민국이 절대 국산화하지 못하는 소재가 있다. 액체와 유리의 중간재격인 액정(液晶)이다. 액정은 전류가 흐르면 모양이 변하면서 TV 화면을 구현해주는 신비한 소재다.

전자업계 보배 같은 존재인 액정이 처음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던 건 아니다. 액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독일 머크는 1904년 액정 개발에 착수하면서 ‘불필요한 유리(uberflussig crystal)’라는 조롱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로서는 액정이 향후 어떻게 활용될 지 확신이 없었다.

물론 LCD TV는 개념조차 없었다. LCD TV의 할아버지격인 배불뚝이(브라운관·CRT) TV가 상용화된 게 그로부터 42년 뒤인 1946년, 미국 RCA가 양산하면서부터다.

110년이 지난 지금 LCD TV가 등장해 머크는 액정으로 매년 수조원을 벌어들인다. 불필요한 유리라고 액정을 조롱했던 이들은 자취를 감췄다. 지난해 머크 기능성소재 사업부의 매출은 16억4200만유로(2조1981억원)다. 이 중 액정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이상이다.

머크는 왜 언제 쓰게 될지도 모르는 액정 개발에 그토록 매달렸을까. 프랭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프 머크 회장의 말 속에 답이 있다. 그는 “주주 이익을 우선시해 단기 실적에만 급급한 기업과 달리, 머크는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 세대를 내다보고 투자한다”며 “당장의 성과만을 좇았다면 액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제조업에선 머크의 우직한 연구개발(R&D) 문화를 찾아볼 수 없다. 국내 뿌리산업을 취재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뿌리기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부품이 조립되기 전 단계에서 각 부품을 다듬고, 깎고, 벼리고, 윤을 내는 곳곳에 뿌리 기술은 숨어 있다.

뿌리 기술을 등한시하면 당장은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뿌리가 부실한 나무가 홍수에 휩쓸리듯, 뿌리기술 없는 국내 제조업도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제조업 강국 일본이 2005년 ‘모노즈쿠리(ものつくり·장인정신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 국가비전 전략‘을 세우고, 뿌리산업을 재정비한 것도 이 같은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2009년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머크 액정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액정 개발 담당 임원의 설명을 곱씹어볼만 하다. “R&D는 철학이고 문화다. 평가나 측정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