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분쟁광물규제가 시행됐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국내 기업들에 별다른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분쟁광물 규제가 국내 산업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일부 나왔지만, 실제 규제 시행 이후에도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편이다. 다만 분쟁광물규제가 국내 중소기업들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미국 내 동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나온다.

◆ 분쟁광물규제 6월 시행됐지만 당장은 자발적 참여 위주로 운영

분쟁광물은 중앙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채굴되는 주석, 탄탈륨, 텅스텐, 금 등 4대 광물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을 중심으로 중앙아프리카 10개국이 분쟁지역으로 지정돼 있는데, 이 지역에서 나오는 4대 광물을 분쟁광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 의회는 2010년 7월 분쟁광물규제가 포함된 ‘도드-프랭크 월가개혁 및 소비자보호법’을 통과시켰다. 분쟁광물 사용을 막기 위해 미국 내 상장기업들이 생산제품에 들어간 광물의 원산지를 공개하도록 했다. 몇차례 시행시기가 연장된 끝에 올해 6월부터 미국 분쟁광물규제가 시행됐다.

중앙아프리카 콩고 인근 분쟁지역에서 채굴되는 광물 지도.

당초 분쟁광물규제가 시행되면 국내 산업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규제가 시행되면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회사들은 매년 5월 31일까지 전년도에 생산하거나 유통한 제품에 분쟁광물을 썼는지 여부를 보고해야 한다. 현재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국내 기업은 8곳에 이른다. 또 이 규제는 상장회사에 납품하는 업체에도 똑 같은 의무를 적용하기 때문에 분쟁광물이 많이 사용되는 휴대폰, 반도체, 가전 관련 업체들은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국내 대기업은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증명하기 쉽지 않다고 토로하고 있고, 중견·중소기업들은 분쟁광물규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대응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규제가 시행된 가운데 당장은 국내 기업들에게 별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분쟁광물규제가 미국 내에서도 큰 반대에 부딪혀 다른나라 상장사까지 관심을 넓히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 재계는 분쟁광물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달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은 일부 위헌 결정을 내렸다. 분쟁광물 보고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일반에 공개하도록 한 것은 제조사가 만든 상품을 스스로 비난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투자자들에게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공시하도록 한 것은 위헌이 아닌 만큼 제도를 계획대로 시행했지만, 증권거래위원회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증권거래위원회의 대니얼 갤러거 위원 등은 위헌 판결이 나온 이후 법적인 결론이 명확하게 내려질 때까지 제도 시행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Y한영 분쟁광물서비스팀 관계자는 “이번 일부 위헌 판결이 나기 전에는 기업이 자사 제품이 분쟁광물에 해당된다고 판단되면, 그들이 무장단체에 자금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펼쳤거나 혹은 앞으로 펼칠 계획을 공개해야 했다”며 “하지만 이번 판결로 앞으로는 그런 내용을 더 이상 공개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분쟁광물규제 대상 광물의 주요 용도.

분쟁광물규제가 분쟁광물 사용 기업에 제재를 가하기 보다는 분쟁광물 사용을 줄이기 위한 권고 제도의 성격이 강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단 2년 정도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상장사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장 미국도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며 “기업들이 분쟁광물 사용을 자발적으로 줄이도록 유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국내 기업 8곳 가운데 이번에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증권거래위원회에 보고한 기업은 포스코와 LG디스플레이 두곳에 그친다. 나머지 기업들은 분쟁광물과 관련이 없다고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보고 자체를 하지 않았다.

◆ 한국 기업 분쟁광물 대응 점수 낮아…추후 제도 강화 대비해야

지금 당장은 큰 영향이 없지만, 앞으로 분쟁광물규제가 본격화될 때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은 다른 나라의 경쟁업체에 비해 분쟁광물 대응 점수가 낮다는 과거 조사 결과도 있다.

북미의 아프리카 인권단체 이너프 프로젝트(Enough Project)는 2012년 24개 글로벌 IT 기업의 분쟁광물 사용량을 토대로 ‘콩고 평화에 이바지한 기업’ 순위를 매겼다. 이 조사에서 한국 기업은 LG와 삼성이 포함됐는데, 두 기업은 공동 14위에 그쳤다. 2년 전 조사보다는 점수가 올랐지만,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인텔, HP, 샌디스크, 필립스, AMD 같은 기업들이 1위부터 5위까지를 차지했다.

분쟁광물 관련 미국 및 EU 규제 비교.

분쟁광물규제가 미국에서 그치지 않고 유럽으로 확대되는 것도 국내 기업들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올해 3월 분쟁광물규제 관련 조치를 제안했는데, 올해 9월 정도에 입법절차를 완료하고 내년부터 규제를 시행할 예정이다. 특히 EU는 규제 대상 기업과 분쟁광물을 사용하지 않는 제련소 목록 등을 미국보다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처벌 대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이지만, 의무 부과 대상기업이 더 광범위하기 때문에 기업들도 더 철저히 준비할 필요가 있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미국 내 기업들이 협력사의 분쟁광물규제 대응여부에 따라 공급망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며 “부품 및 원부자재 조달체계를 점검해 분쟁광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들을 확보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