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현금만 잔뜩 쌓아놓은 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2일 본지가 10대 그룹의 30개 주요 계열사들의 2013년도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작년 말 삼성전자의 현금은 54조5000억원으로 2012년(37조4500억원)에 비해 17조500억원 정도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회사의 현금 보유액은 매년 늘고 있다. 이변(異變)이 없는 한 올 연말에는 20조원 정도 더 추가될 전망이다.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다. 현대차그룹 '3두(頭)마차'(현대차·기아차·모비스)의 현금 보유액은 같은 기간 5조원이 늘어난 35조원에 달했다. 10대 그룹 소속 주력 계열사 중 최근 1년간 현금 보유액이 감소한 회사는 포스코·SK이노베이션·LG디스플레이·대한항공·대우인터내셔널·삼성SDI 등 소수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한국 대기업들이 대형 투자처를 찾는 데 실패함에 따라 신(新)성장동력 상실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①수십조원 현금을 은행 단기금융상품으로 굴려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만기 3개월 미만 예금은 2012년도에 비해 2조5000억원 줄었으나, 만기 3개월~1년의 단기금융상품에 가입한 금액은 작년 한 해 동안 19조원 넘게 늘었다.

만기 3개월 미만 예금은 보통 직원 월급을 주거나 기자재를 사오는 등 경영상 필수불가결한 활동비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보다 긴 단기금융상품은 올 연말까지 당장 용처(用處)가 없어서 은행 예치로 이자(利子) 받기에만 주력한다는 방증이다. 현금은 많이 들어왔어도 쓸 곳을 못 찾다 보니 이자수익을 겨냥해 단기금융상품에 돈을 대거 넣고 있는 셈이다. 윤우진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인들이 투자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데 최근의 과도한 현금화는 기업들에 1차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측은 "우리와 비슷한 글로벌 IT기업인 애플의 작년 말 현금 보유액은 1588억달러(약 168조원) 정도"라며 "삼성이 작년에 사상최대 투자를 했듯 투자를 적게 해서 현금 보유액이 늘어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②기업들, 대형 M&A 회피

이런 현상은 대형 인수합병(M&A)에 주요 기업들이 머뭇거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국내에만 동양·웅진·STX·동부·현대그룹 등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은 기업 매물이 나와 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국내에서 덩치가 커질 경우, '견제'를 우려해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형 로펌 관계자는 "매물은 많이 나와 있지만 이를 사갈 기업은 거의 없어 성사율(成事率)이 매우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배상근 전경련 상무는 "무엇보다 대기업들이 국내외에서 맘껏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 최근 1~2년 동안 왕성한 해외 M&A를 하는 중국·일본 기업들과 달리 한국 기업들이 실패를 우려해 해외 진출에 매우 소극적인 탓도 있다.

정부, 기업들의 兆단위 투자 기회 봉쇄

기업들의 자발적인 대규모 투자 노력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단적으로 현대차그룹은 2조원을 들여 서울시 뚝섬에 110층짜리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지으려던 계획을 지난해 포기했다. 서울시가 50층·200m 이상 빌딩을 지을 수 있는 도심·부도심 범위에서 뚝섬 부지를 뺀 게 결정적이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는 "대기업들이 쌓아놓은 현금을 국내 투자에 쓰도록 하려면 중앙과 지방정부가 수도권 규제 같은 케케묵은 규제를 과감히 풀고 기업 친화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금, 단기금융상품

기업에서 현금 자산은 예금 형식으로 넣어두는 만기 3개월 미만 현금성 자산과 만기 3개월~1년 미만의 단기금융상품으로 구분된다. 현금성 자산은 기계류 구입과 직원 월급 지불 같은 운영 자금으로 많이 쓰인다. 단기금융상품은 은행 이자를 받기 위해 금융권에 일정 기간 예치한 여윳돈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