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의 신년 광고

최근 정부의 정책 기조인 ‘창조경제’를 몸소 실천하겠다는 기업이 부쩍 늘었다. 기업이 정부 정책에 호응하는 경영 방침을 내세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문제는 정작 투자나 고용은 늘리지도 않으면서 구호만 남발하며 이미지 구축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총수가 재판중인 기업들도 이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총수가 부재중이라 중요한 투자결정도 미루면서 단순히 정권과 코드를 맞추며 위기 모면에 급급한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 대기업 임원은 “경기 침체로 올해 투자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러한 마케팅 전략을 하는 이유는 결국 정부와 여론에 잘 봐달라는 의미 아니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대기업들의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당장 다음달 초부터 재개될 총수들의 선고 공판이 재개될 예정이지만, ‘사회 지도층의 경제 범죄를 엄벌한다’는 법원의 분위기는 요지부동이라는 게 법조계의 판단이다. 청와대도 이번 설 특사로 생계형 범죄를 지은 6000명을 사면할 방침을 정했지만, 기업인에 대한 사면은 없을 것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 총수 부재 기업들, 정권과 교감 노력…창조ㆍ행복 강조

효성은 연초 새 광고로 힘차게 뛰어 오르는 말의 이미지와 함께, “창조경제를 이끌어 가는 효성이 되겠습니다”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또 효성이 상업화에 성공한 폴리케톤·탄소섬유 등 미래사업을 통해 창조경제 시대의 주역이 되겠다는 다짐도 넣었다. 광고의 힘이었을까. 효성 조석래 회장은 9일 검찰로부터 불구속 기소를 받아낸데 이어, 21일 질병을 이유로 출국까지 했다.

CJ는 최근 계열사인 CJ E&M 소유 채널을 통해 ‘문화를 만듭니다’라는 광고를 선보이고 있다. 이 광고에서 CJ는 케이팝(K-POP) 행사인 ‘MAMA(마마)’와 한식브랜드 ‘비비고’, 영화 ‘설국열차’, 드라마 ‘응답하라1994’ 등을 언급하며 “문화로 미래를 창조하고 싶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부의 창조 경제를 응원하는 한편, CJ가 이에 걸맞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광고 업계 관계자들은 특히 CJ의 기업 광고에 주목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문화는 CJ가 제일 잘하는 일’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면 정부보다 CJ가 더 창조경제를 잘하고 있고, 먼저 생각해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한화와 CJ는 오너 일가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기업의 창조경제 활동을 알리기도 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략마케팅실장이 다보스 포럼에 참석했다. 김 실장은 “한화그룹은 태양광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며 “인류의 미래에 이바지하겠다는 김승연 회장의 확고한 철학에 따라 태양광 등 에너지 사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것”이라 말했다. 한화는 올해 다보스 포럼의 콩그레스센터 지붕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설비를 김 실장이 기획했다고 전했다. CJ 이미경 부회장은 다보스 포럼 기간 중 열린 ‘한국의 밤’ 행사에 참석해 CJ가 추진해온 한류와 한식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이 행사에는 박 대통령과 가수 싸이, 국내외 유명기업 최고경영자 등이 참석했다.

재계 관계자는 “한화와 CJ의 오너 일가가 다보스에 참석해 창조경제 관련 활동을 한 것은 진행 중인 오너의 재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전했다.

SK그룹은 새해 광고에서 창조 대신 ‘행복’을 키워드로 내세웠다. SK는 행복나눔재단을 운영하고 있고, 행복나눔바자회, SK행복나눔김장행사 등 회사 차원의 사회공헌 활동에도 유독 '행복'을 강조하고 있다. 행복은 박근혜 정부가 창조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키워드 중 하나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유세 때부터 ‘국민 행복시대’를 강조해 왔다.

◆ 사회공헌으로 이미지 쇄신

정권과 코드 맞추기 광고 외에 이들 기업들이 선전하는 또 하나의 주안점은 사회공헌이다. 총수가 부재중인 기업들이 지난해 언론에 낸 보도자료를 살펴보면 적게는 20%, 많게는 50% 가량이 사회공헌 관련 자료였다.

효성의 경우,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신입사원들이 연탄 나눔 행사를 벌였다는 자료를 배포했다. 지난해 12월 이후 불우이웃 돕기 성금 기탁과 계열사의 일자리 창출 대통령상 수상, 사회적 기업 지원 등 관련 자료만 10여개에 달한다.

한 홍보 전문가는 “일부러 부정적인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선한 활동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소비자에게 강조하고 있다”며 “국가와 사회에 공헌한다는 점을 부각시켜 위기를 넘기려는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총수가 탈세·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기업들이 사회공헌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도 그랬다.

2007년 현대차 비자금과 관련한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당시 항소심에서 2013년까지 8400억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정 회장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에 걸쳐 총 6500억원 상당의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정몽구재단에 기부금으로 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역시 2008년 초 삼성특검을 통해 4조원대 차명재산이 드러나자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는 2조원이 넘는 차명주식을 실명 전환한 뒤 세금과 벌금을 내고, 1조원 정도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1조원 기부 약속은 아직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사회 환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방법론적 고민이 많아 시행 시기가 조금 지연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CJ의 TV 광고

◆ 기업들 임시 비상체제 운영 “오너 부재 타격 커”

이들 기업 대부분은 현재 임시 비상체제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조 회장과 장남인 조현준 사장, 주요 경영진이 모두 불구속 기소 상태인 효성은 퍼포먼스유닛(PU) 체제다. 효성은 검찰 수사로 주력 시장 중 하나인 베트남 시장에서 신뢰도에 타격을 입었다고 업계에선 전했다. 장기적인 투자 계획이 필요한 신소재 ‘폴리케톤’ 사업도 비상이 걸렸다.

CJ그룹은 손경식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사퇴하고 8년 만에 그룹으로 돌아왔다. 손 회장과 이재현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 이채욱 CJ대표 등 5명이 모여 그룹 차원의 결정을 내리는 ‘그룹경영위원회’를 운영하며 오너 중심 경영에서 전문경영인 중심의 집단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의 부재로 실적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증권가에선 진단한다.

SK그룹의 경우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필두로 최고임원 협의체를 만들어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최 회장의 부재가 뼈 아프다. 태국 조기재해 경보시스템, 터키 화력발전소 사업 등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 한화는 김연배 부회장을 주축으로 지난해 4월부터 비상경영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의 부재로 이라크 신도시 추가 수주 등의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 대법원, 배임수·증재 선고 가능 형량 ‘상향 조정’···기업인 범죄 엄단 기조 유지될 듯

이런 기업들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총수 범죄’에 대한 법원의 부정적인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연말 발표한 양형기준 개정안에서 배임 수·증재의 형량을 높였다. 1억원 이상 배임수재 범죄에 대해서는 형량을 최고 징역 9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고, 배임증재에 대해서도 최고 3년6개월의 실형 선고를 가능하게 했다. 종전에는 배임수재는 5년 이하 징역, 배임수재는 2년 이하 징역이 선고 가능 최고 형량이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배임수재의 경우 수재액이 큰 구간에서는 규범적 조정을 해 엄정한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면서 “배임증재의 경우 적극적으로 증재한 경우는 특별가중인자로 반영하는 등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와 동기를 양형 요소로 고려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다음달 6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 이후 줄줄이 이어질 대기업 총수 재판에도 양형기준 개정 취지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인 범죄 사건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이후 기업인에 대한 관용적인 판결이 내려질 있다는 기대감이 재계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너무 섣부른 기대”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조석래 회장의 경우 고령인데다 신병을 앓고 있어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판단한 것이지 범죄 성립 입증 여부가 주된 결정 사유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기업관련 변호사들은 “배임수증재 영향 기준 개정 등을 볼 때 기업인 범죄를 엄벌하겠다는 대법원의 시각에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