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벌어진 ‘토이 워즈(Toy Wars·장난감 전쟁)’의 승자는 4살된 국산 애니메이션 캐릭터 ‘또봇’ 이었다. 인터넷과 대형마트 등에서 연일 매진 행진을 벌이며 ‘만년 승자’였던 레고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한국에서도 80년이 넘은 레고나 미키마우스 등 외산 캐릭터와 경쟁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환호했다.

또봇은 '뽀로로'나 '로보카 폴리' 등에 이은 4세대 국산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분류된다. '뽀통령'의 뒤를 이어 세계와 대등하게 경쟁하는 캐릭터가 나왔다는 기대감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공한 일부 캐릭터를 제외하면 국내 애니메이션·캐릭터 산업은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협소한 영유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데다 해외진출은 아직 미키마우스나 헬로키티 등 글로벌한 캐릭터와 비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도약기를 맞은 국내 애니메이션·캐릭터 산업을 3회에 걸쳐 진단해본다. 【편집자주】

투바앤의 '라바'(왼)와 아이코닉스와 오콘이 제작한 '뽀롱뽀롱뽀로로'


국내 캐릭터산업에 훈풍이 불고 있다. 2003년 등장한 뽀로로가 토종 캐릭터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 로보카폴리, 또봇, 라바(☞동영상보기) 등 후속주자들이 캐릭터산업 붐을 이어가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아이코닉스와 오콘, EBS와 SK브로드밴드가 제작에 참여한 뽀로로는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희망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외국회사의 하청제작 주문에 의존했던 기존 업계에서 독자적인 기획과 제작으로 성공을 일군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뽀로로가 갖는 상표 가치는 약 1조원으로 ‘강남스타일’과 아이돌그룹 ‘엑쏘’와 맞먹는다. 뽀로로가 창조한 부가가치 시장은 5조원으로 국내 아웃도어 시장 규모와 비슷하다. 문화콘텐츠가 만들어 내는 부가가치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한국판 미키마우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올해 86세인 미키마우스가 매년 월트디즈니에 가져다주는 수익은 6조원이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가 웬만한 대기업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지만, 흥행에 실패할 경우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고스란히 빚으로 져야 하는 위험부담도 따른다. 뽀로로 제작사 아이코닉스도 본격적인 흥행 전에 세 차례에 걸친 실패를 겪었고 60억원이 넘는 적자를 입었다.

최종일 아이코닉스 대표는 “외부 재원없이 평균 30억~50억원에 달하는 콘텐츠 제작비를 제작사 혼자 힘으로만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다”며 “문화콘텐츠의 성공 여부를 단순히 창작자의 실력이나 운에만 기댈 것이라 아니라 정부와 공영방송사가 나서 비용 부담을 나누는 등 안정적인 창작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전 재산 털어 만든 콘텐츠 ‘제값받기’어려워…판권료 10%에 목매

캐릭터를 만든 업체가 30분짜리 애니메이션을 한 회 제작하려면 평균 1억~2억원의 비용이 든다. 26부작 시즌 하나를 제작한다고 가정하면 26억원에서 많게는 50여억원이 투입되는 것이다. 하지만 높은 제작비에 비해 방송사가 제작자에게 지불하는 방송료는 제작비의 10% 미만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1억원을 들여 애니메이션 한 회를 제작해도 방송료로 얻는 수익은 1000만원에 불과하다. 2000년 이후 설립된 소규모 신생 업체가 68% 이상인 국내 캐릭터산업에서 공공 부문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적인 목소리다.

프랑스나 일본, 캐나다 등 콘텐츠 강국의 여건은 국내보다 낫다. 방송료 수익은 제작비의 평균 20~25%로 우리나라의 두 배를 넘어선다. 이에 자국 문화콘텐츠를 육성하기 위한 제작 지원도 활발한 편이다. ‘방송프로그램산업 국가재정지원제도’를 운용하는 프랑스는 국산 제작판정을 받은 작품을 대상으로 제작비의 30~50%을 환급해 주고 있다. 최대 25%에 달하는 방송료 수익까지 더하면 제작비의 75%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캐나다 정부도 ‘캐나다 미디어펀드’를 운영하고 있고 올해부터 2년간 360억달러 예산을 이 사업에 편성했다.

문종현 서울산업통상진흥원 정책사업본부장은 “이미 콘텐츠 분야에서 앞서 가는 국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펼치는데,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에서 콘텐츠 제작사는 나 홀로 고군분투하는 상황”이라며 “제작 여건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 영유아 콘텐츠 ‘쏠림 현상’도 극복해야

헬로 카봇 캡처 화면


높은 위험이 따르다 보니 성공이 검증된 콘텐츠에 대한 '쏠림 현상'도 심하다. 특히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의 경우 제작품의 70% 이상은 3~5세 영유아나, 7~9세 아동용이다. 2003년 등장한 뽀로로가 성공 대명사가 됨에 따라 후속주자들이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콘텐츠를 잇달아 출시하며 '쏠림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변신 자동차 또봇'(2010년)이나 '로보카폴리'(2011년), '헬로 카봇'(2013년)(☞동영상보기) 등 최근 히트한 국내 작품 대다수도 어린이층을 공략하고 있다.

신규 애니메이션의 관문인 EBS의 주요 프로그램이 유아·어린이(23.8%)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도 전 연령의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측면이 있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영유아용에 치중한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을 다변화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애니메이션·캐릭터 산업 지원 예산을(224억원)을 대폭 늘리고 전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가족용 애니메이션 제작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김시범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는 “명확한 타겟층을 갖는 것은 좋지만, 단편적인 성공 사례만을 좇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영유아에 한정된 콘텐츠에 지나치게 집중되면 관련 시장이 성장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며 “캐릭터 상품사업과 캐릭터를 활용한 뮤지컬, 만화, 게임 등 2차 저작물의 타겟층을 전 연령층으로 확대해 전체 시장 파이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0년대 초기 미키마우스 모습.


미키마우스의 장수 비결도 이 같은 '소비자층 확대' 전략에 있다. 월트디즈니는 1928년 아동용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동영상보기)를 통해 미키마우스를 선보인 뒤 타겟 소비자층을 전 연령으로 확대했다. 유아용 상품에는 '베이비 미키'를, 10~20대와 중년층을 겨냥한 상품에는 '컨템퍼러리 미키'와 '클래식 미키'를 내세웠다. 1960년대 이후로는 미키마우스의 주 사업 모델을 애니메이션에서 테마파크로 바꾸며 전 가족 구성원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