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DB.

-20개월 경상 흑자 행진‥올해 630억弗 일본 제칠 전망
-투자 위축 주요 원인‥장기침체 일본과 닮은 꼴 우려

우리나라 경상수지가 20개월 연속 흑자 행진이다. 자본 거래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과 상품·서비스·소득 거래를 하고 남은 손익이 2년 가까이 흑자니 개념상 매우 기뻐할 일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 규모를 630억달러 이상으로 내다봤다. 올해 사상 처음으로 일본 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될 정도로 큰 규모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5.2~5.3%로 1999년 5.3% 이후 14년만에 최고치에 달할 전망이다.

하지만 흑자 행진의 주요 배경을 놓고 보면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경제 성장의 결과물이 아니라 기업 투자 위축 등 내수 부진이 반영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우리나라의 경상 흑자는 심하게 말하면 기업이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장기적으로 망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우려감을 나타냈다. 장기적으로 보면 투자에 나서지 않는 기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경상 흑자를 좋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도 12일 내놓은 '최근 경상수지 흑자 확대의 요인 분석' 보고서에서 "작년 하반기 이후 경상수지 흑자는 주로 내수 부진과 교역조건 개선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특히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우리 경제 구조가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일본은 1991년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1300억달러의 경상 흑자를 냈지만 경기는 투자 부진 등으로 침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기업이 투자를 안 할 수록 커지는 경상수지 흑자

국민소득 항등식에서 경상수지는 이론적으로 국내 경제주체(가계 기업 정부)의 저축에서 투자를 뺀 것과 일치한다. 국민소득(Y)은 소비(C), 투자(I), 정부지출(G), 경상수지 흑자의 합이며(Y=C+I+G+경상흑자), 저축(S)는 국민소득(Y)에서 가계소비(C)와 정부지출(G)로 사용되지 않은 부분이기(S=Y-C-G) 때문이다.(S-I=경상흑자) 개방경제에서는 국내 저축으로 투자를 충당하고 남은 경우 이를 국외에 빌려주는데 이 것이 바로 경상수지 흑자다. 반대로 저축이 투자를 충당하지 못해 해외에서 차입하면 그 만큼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한다.

한국은행 자료.

경상수지 흑자는 경기가 좋을 때 뿐만 아니라 경기가 나쁠 때도 나타날 수 있다.

첫번째는 경기가 좋아 저축과 투자가 모두 활발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저축이 활발한 투자를 감당하고도 남는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계의 대규모 저축을 기반으로 기업 투자가 증가하고 가계 소득이 늘어나 경제 활력이 높아진다. 그 결과 정부 세수가 늘어나고 재정이 건전해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두번째는 경기가 좋지 않아 경제 주체들의 투자 심리기 위축되는 경우다. 투자가 줄면 경제성장 잠재력이 악화되고 가계 소득도 감소한다. 이렇게 경기가 나빠지면 세수도 줄고 정부는 기업이 하지 않는 투자를 재정으로 메꿔 경기를 진작시키려 하기 때문에 재정적자가 확대된다.

우리나라 경상 흑자 행진이 기업 투자 위축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기 때문에 지금 상황은 두번째에 속한다.

저축률에서도 확인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기업 저축은 늘어났고 가계 저축은 감소했다. 1988년 14.8%였던 기업 저축률은 2011년 19.9%로 상승했고, 같은 기간 가계저축은 18.7%에서 4.3%로 급락했다. 정부 저축률은 7.0%에서 7.6%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기업을 중심으로 저축은 늘어났지만 투자는 오히려 감소했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투자율은 외환위기 이전(1981년~1997년) 34.3%에서 외환위기 이후(1998~2011년) 29.5%로 낮아졌다.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고 곳간에 자산을 쌓아둔 것이 경상수지 흑자로 나타난 것이다.

지난달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한 금통위원은 "기업의 대규모 저축이 경상수지 흑자의 주된 배경이 된 것이 우리 경제 구조 변화의 큰 흐름"이라며 "이는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이 경험한 사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것이 경제 활력을 저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경상 흑자, 원화 절상 압력으로 작용…내수 진작 필요

문제는 경상 흑자가 기업의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장 환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경상 흑자가 2년 가까이 이어지며 달러 대비 완화 환율은 최근 빠른 속도로 하락했다.(원화 가치 상승) 우리나라 채권과 주식 시장으로 대규모 외국인 자금이 유입된 영향도 있었다.

환율이 급락하며 우리 기업의 채산성도 떨어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환율이 10% 하락하면 국내 제조업의 수출은 4.4% 감소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환율 급락은 수출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경기 회복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도한 경상 흑자가 무역 마찰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우리 경상 흑자가 이어지며 우리나라를 상대로 한 다양한 무역 보복 조치나 비(非)전통적 수입 규제 정책이 취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연구원 이창선 연구위원은 “내수시장에서 대외개방도를 높여 수출, 수입의 균형 증가로 경상수지 흑자가 과도하게 누적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재무부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상 흑자 폭이 커지는 것은 최근 원화 가치 상승에 따른 것인데, 한국 정부가 외환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우려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은 경상수지 성적표에 취하지 말고 소비를 늘리고 기업 투자를 활성화해 내수를 진작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올해 연례협의에서 한국 경제 정책의 가장 우선순위는 내수를 진작하는 것이라고 권고했다.

중국과 독일의 최근 움직임은 참고할 만하다. 중국은 그동안의 투자ㆍ수출 위주의 성장 방식에서 탈피해 소비에 기반을 둔 내수 위주의 성장 방식으로 서서히 전환하고 있다. 독일 역시 처음으로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공공투자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등 소비를 진작시켜 내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중국과 독일은 최근 10여년 동안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글로벌 불균형의 주요 원인이 되는 국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