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너 3세의 경영권 포기로 화제가 된 대한전선은 금융권 부채가 약 1조3000억원, 6월 말 현재 부채비율은 8300%에 이른다. 채권단은 이 회사 부채의 절반가량을 출자전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데, 만약 성사되지 않을 경우 완전 자본잠식으로 인한 상장폐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대한전선 무보증 회사채에 대해 BB+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원리금 지급 능력에 당면 문제는 없으나 장래의 안정성 면에서는 투기적인 요소가 내포돼 있다'는 BB등급보다도 한 등급 위다.

유동성 위기로 최근 모기업인 대한항공으로부터 1500억원을 긴급 수혈받은 한진해운은 2011년 이후 8000억원의 적자를 내는 바람에 부채비율이 775%까지 치솟은 상태다. 한진해운은 자금 조달을 위해 영구채 발행을 타진했지만, 해운업황 부진이 장기화될 우려가 크고 회사의 부채비율도 너무 높다며 은행들이 지급보증을 거부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진해운의 신용등급은 투자적격인 A-를 유지하고 있다. '원리금 지급 확실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국내 신용평가, 외국사에 비해 6~7단계 '뻥튀기'

최근 STX·웅진·동양그룹 등 중견그룹이 줄줄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신용평가사 책임론이 일고 있지만 신용등급 인플레이션 현상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국신용평가·한국기업평가·나이스신용평가 등 3개 신용평가사들이 부여한 국내 기업 회사채 등급 가운데 A등급 이상이 79%에 이른다. 한국신용평가의 경우 391개 기업 중 A등급 이상은 82.6%, 투자적격 비율은 91%다. A등급 비율이 가장 낮은 한국기업평가도 A등급 이상이 75%, 투자적격 비율은 95%에 달한다.

이 때문에 국내 신용평가사가 매기는 등급이 외국 평가사에 비해 6~7단계 부풀려져 있다는 말이 정설처럼 돼 있다. 가령 SK하이닉스는 스탠다드앤푸어스(S&P)와 무디스로부터 각각 투기등급인 BB·Ba2등급을 부여받고 있지만,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투자적격 등급 중에서도 꽤 높은 A+로 평가하고 있다. LG전자는 외국사로부터 상위 9~10등급에 해당하는 BBB-·Baa2를 부여받았지만, 국내 평가사들은 셋째로 높은 AA를 매기고 있다.

기업 신용 리스크 투자자에게 전가

너무 후한 신용등급은 기업 신용 리스크가 투자자들에게 과도하게 전가(轉嫁)되는 효과를 낳는다. 일반 투자자들은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등에 투자할 때 신용등급에 의존해 투자할 수밖에 없는데, 신용등급이 실제보다 높게 부여되면 투자자들은 낮은 수익률에 더 많은 리스크를 부담하게 된다. 반면 기업은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시멘트 CP의 경우 법정관리 신청 한 달 전까지 A3-등급을 받고 있다가 한 달 새 D등급까지 다섯 단계 떨어지면서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됐다.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는데도 법정관리 신청 직전까지 발행과 유통이 가능한 B등급으로 평가받아 CP를 판매했다.

이런 사태가 반복되면서 신용평가사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지난 5월 한국금융투자협회의 신용평가기관 평가 결과에 따르면, 신용평가사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는 2011년 5.39점(10점 만점)에서 5.04점으로, 평가 독립성에 대한 신뢰도는 4.87점에서 4.53점으로 각각 낮아졌다.

못 믿을 신용등급이 남발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용평가사들이 신용 평가 대상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아 운영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신용평가사들도 채권 발행자(기업)로부터 수수료를 받긴 하지만, 회사채 평가 수수료 수입 비중이 크지 않아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훈 동국대 교수는 "한국의 경우 개별 기업이 아니라 기업집단 차원에서 압박이 들어오다 보니 신평사들이 더 저항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며 "특정 기업집단에 대한 수입 의존도를 공시하는 '의존도 공시' 제도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