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위기를 겪는 STX그룹이 운영하는 STX다롄조선소는 요즘 개점휴업 상태다. STX그룹이 2008년부터 다롄조선소 조성에 쏟아부은 돈만 15억달러(약 1조6500억원)에 달한다. 550만 제곱미터(약 170만평)의 부지에 한때 2만명이 넘는 인력이 근무했지만, 요즘은 작업 인력보다는 임금·납품대금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대만 북적거리는 상황이다.

조선업계 전체가 겪고 있는 극심한 수주 가뭄에 모회사의 유동성 위기까지 겹치면서, 몇 개월째 납품대금은 물론 임금까지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지 협력업체들이 줄도산 위기를 맞으면서, 현지 주민 사이에선 반한(反韓) 감정마저 싹트고 있는 상황이다.

STX다롄조선소는 현재 한국 조선산업이 직면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2007년까지 이어진 조선산업 호황기 때 대대적으로 투자했거나 전문 인력과 기술 없이 조선업에 뛰어들었던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있다.

호황 속에 싹튼 거품… 골병든 세계 1위

한국은 조선 업종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1위 국가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세계 3대(빅3) 조선업체가 모두 한국에 몰려 있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지난해 750만CGT(건조 난이도 등을 고려한 수정환산톤수)를 수주해 세계 선박 수주량의 35%를 차지했다. 수주 단가도 1톤당 3998달러로, 중국(2176달러)과 일본(1794달러)을 압도했다. 빅3가 해양 플랜트 설비나 고부가 대형 상선(商船)을 집중적으로 수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빅3의 모습일 뿐이다. 해양 플랜트 시장에 발 빠르게 대응한 빅3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사는 '거품 붕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몰아닥친 경기 침체로 화물선·유조선·컨테이너선 등 일반 상선의 발주 물량은 조선 호황기와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후발 주자인 중국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공격적 수주에 나서면서, 2000년대 남·서해안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중소 조선소는 이미 상당수가 쓰러졌다. 문을 닫은 중소 조선소는 대부분 대형 조선소에 기자재를 납품하다 호황기 때 직접 선박 건조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당했다.

◇매출 급감, 적자로 부채 급증

빅3를 제외한 나머지 조선업체는 이미 적자의 늪에 빠졌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해 중하위권 조선업종 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2.9%로,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빅3를 제외한 나머지 조선소 자기자본비율도 2011년 39.1%에서 2012년 37.3%로 줄어들었다. 자본을 점점 까먹고 있다는 뜻이다.

본지가 STX조선·한진중공업 등 중위권 조선업체 두 곳의 실적(연결재무제표 기준)을 분석한 결과, 매출과 영업이익 급감에 따른 대규모 손실과 부채 비율 증가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최근 모기업(STX그룹) 부실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STX해양조선은 지난해 매출 6조2000억원에 적자 7820억원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부채비율이 지난 2년 동안 539%에서 1500%(올해 1분기 기준)로 3배로 급증했다.

노사 분규가 정치적 이슈로 번졌던 한진중공업은 2009년에서 2012년 새 영업이익이 8분의 1로 쪼그라들었고, 2010년부터는 매년 500억~900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다. 올해는 1~3월 석 달 만에 지난해 전체와 맞먹는 495억원의 적자를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극심한 수주 가뭄이 이어지면서 최근엔 빅3마저 실적 악화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현대중공업은 2010년 4조원대였던 순익이 지난해엔 1조원대로 급락했다. 증권가에선 "빅3 기업의 실적이 더 악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매출을 좌우하는 2011~2012년 수주 실적이 나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저가 수주 현상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감이 없어 독(선박건조장)을 놀릴 바에야 저가에라도 수주하는 것이 낫다 보니 국내 업체들끼리 제 살 깎아 먹기 식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대출 50조 중 10조가 부실 우려

조선업은 막대한 자금을 중장기적으로 빌려줄 금융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배 한 척당 가격이 수백억~수천억원에 이르고, 선박 한 척을 짓는데 1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또 배를 수주할 때 조선소가 받는 선수금(先受金)에 대해선 선주들이 선수금환급보증(RG)을 받는데, 이것 역시 금융의 역할이다. 이렇다 보니 금융권은 조선업에 대한 대출이 많고, 대출 부실화에 따른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 은행들의 조선업 대출액은 최소 50조원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16개 시중은행이 26조원, 수출입은행이 약 20조원이다. 산업은행의 대출액 규모에 따라 60조원 이상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A금융지주 리스크 담당 임원은 "조선업의 연체율(약 13%·3월말 기준)을 감안하면, 최대 10조원의 부실 채권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라면서 "만약 그렇게 되면 조선업의 위기가 은행의 위기로 전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지난해 성동조선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2조원 이상의 추가 자금을 대출해 줬는데, 2조원 전액이 부실 채권이 됐다고 보고 있다. B은행 자금담당 부행장은 "과거 호황기에 전국 곳곳에 조선소가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조선업 버블'을 예감했다"면서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 조선업체들이 부실의 늪에 빠지면 폐업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