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건설 시장에서 국내 업체 간 과당 경쟁으로 국부(國富) 손실이 계속 일어나는데도 정부는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다.

현재 국토교통부는 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이란·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 등 전 세계 22개국에 '국토교통관'이란 이름으로 주재관을 파견하고 있다. 현지 기업 활동을 지원해 국익(國益)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국내 건설사들 저가(低價) 출혈 경쟁에 팔짱만 끼고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정부가 나서서 사기업 이해관계를 조정하려 하다가는 부당 개입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담합(談合)으로 걸릴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부 건설사들은 "해외 입찰 과정에서 후발 주자가 무리하게 저가로 치고 들어와 모두가 손해나는 상황에 이르러 국토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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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A사가 6억달러가량에 따낸 사우디 설비 공사는 국내 4개 건설사가 함께 뛰어들면서 출혈 경쟁이 벌어져 낙찰가가 예상가의 34%에 그치는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원래 17억달러 이상은 받을 수 있다고 점쳐졌던 공사였다. 이 과정에서 현지 주재관은 물론, 국토부도 문제가 있다고는 봤지만 무기력하게 국내 업체들끼리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 때문에 "주재관이 도대체 하는 일이 뭐냐"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 주재관들은 본국 정부에 보내는 정보 보고나 비자 발급 보조 등 극히 일부 기능만 맡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해외 수주 담당 대형 건설사 임원은 "20년간 각국을 돌면서 영업에 도움을 주는 '세일즈 마인드'를 갖춘 주재관은 본 적이 없다"며 "10년 이상 발주처와 관계를 맺어도 미팅 날짜 한번 잡기 쉽지 않은데 2~3년마다 바뀌는 공무원들이 뭘 알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주춤하던 해외 건설은 이명박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2006년 165억달러이던 수주액이 2008년 476억달러, 2010년 716억달러, 2012년 649억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은 정종환(3년 3개월 재임)·권도엽(1년 9개월)씨. 이들은 직접 또는 차관이나 실·국장으로 이뤄진 고위급 수주지원단을 매년 10번 안팎 해외에 파견했다.

지난해에도 권 전 장관이 4차례 이상 수주 지원 명목으로 해외 출장을 가는 등 장·차관, 실·국장이 중동과 남미·아프리카 등을 10번 이상 골고루 돌았다.그러나 이들이 해외 건설 수주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거나 현지 국내기업들 분쟁을 조정해 '윈윈'을 끌어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장관이) VIP(대통령을 지칭하는 은어)를 따라와 VIP 심기에만 신경 쓰지, 기업들 애로사항에는 관심이 없더라", "괜히 격려한다고 장관이나 차관이 오면 브리핑 준비하라고 하고 식사대접도 해야 하고 되레 번거로운 일이 더 많다"는 등 현지 건설사들 불만은 매우 크다.

국토부는 해외 건설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해외건설과 1개뿐이던 조직을 지난해 해외건설정책과와 해외건설지원과로 나눠 확대하고, 직원을 12명에서 23명으로 늘렸다. 관련 예산도 2011년 40억원, 2012년 55억원, 올해는 105억원까지 대폭 끌어올린 상태. 이렇게 조직 몸집은 커가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정부도 무조건 실적만 외칠 뿐 실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 손해 보는 공사를 따오는지 뭔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75년 해외 건설 진출 지원을 위해 민간 건설사들이 힘을 합쳐 만든 해외건설협회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협회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과당 경쟁을 막기 위해 2009년부터 해외공사수주협의회를 만들어 조율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실적은 없다. 그나마 10대 건설사 중 삼성물산은 협의회 참가조차 거부하고 있다.

협회장도 지금까지 16대를 거치는 동안 14대(이용구 당시 대림산업 회장)를 제외하고는 국토부나 기획재정부 간부들이 퇴직 후 '낙하산'으로 앉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 현 16대 최재덕 회장도 국토부 차관 출신이다.

대형 건설사 한 임원은 "해외건설 시장은 건설업계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면서 "일본이 한국을 제치고 최근 25조원 규모 터키 원전을 수주했는데 앞으로 대형 공사에서 정부가 직접 관여하는 사례가 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정부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진다"고 말한다. 2011년 싱가포르에서 도로공사 수주전을 앞두고 국내 건설사들끼리 모여 "출혈 경쟁을 자제하자"는 등 협의를 해보려 했는데 이런 움직임을 현지 발주처가 눈치 채고 모임 자체를 차단한 적이 있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정부 중재 포함) 한국 기업들끼리 협의를 하게 되면 현지에서는 담합하는 것처럼 여겨 부담이 크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건설사들은 "정부가 중재하면 기업 결정에 간섭하는 게 문제 될 것 같지만, 국내 건설사들은 주무 부처가 나서서 강력히 얘기하면 무시 못하고 결국 말을 듣게 된다"며 정부에서 나서주길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