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은 최근 지난해 우리나라 고정금리 대출 비중이 14%로 1년 새 4배로 높아졌다는 것을 홍보하는 통계를 내놓았다.

변동금리가 지나치게 높은 우리나라 대출 시장 구조에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배후엔 주택금융공사가 보증하고 은행이 파는 고정금리 대출 상품인 '적격대출'〈용어 설명 참고〉이 있다.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다는 메리트가 있어 요즘 시중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하면 거의 모두 적격대출이다. 가령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올 들어 한 달 반 동안 일으킨 주택담보대출 9000건 중 80%는 적격대출이다. 지난해만 14조2000억원, 주택 매매시장이 한산했던 올해 1월에도 8000억원이 적격대출이라는 이름으로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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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룡처럼 몸집이 커지고 있는 적격대출의 순기능도 있지만, 위험한 요소도 숨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 관련 학자들의 연구 모임인 금융연구센터는 최근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했고, 적격대출을 관리하는 주택금융공사가 해명하자 다시 이를 반박했다. 학계가 특정 금융상품의 단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적격대출에 대한 학계의 비판 논리는 크게 2가지다. 원금을 갚지 않고 이자만 갚아도 되는 거치 기간을 왜 두느냐는 것, 그리고 신용등급 8등급까지 대출해 주는 것이 공기업의 설립 취지에 맞느냐는 것이다.

52%가 아직 이자만 상환하고 있어

우리나라 주택담보대출 시장은 일년 전만 해도 변동 일시상환대출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를 들어 3년 동안은 이자만 갚다가 3년 후에 원금을 한꺼번에 갚는 방식이다. 주택 거래가 활발하고 집값이 올라갈 때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집을 팔아서 갚으면 됐고, 대출 금리가 올라도 오른 집값이 이를 상쇄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택 경기가 곤두박질치면서 문제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적격대출은 비정상적인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변동 금리-원리금 일시 상환대출이 주도하던 대출시장을 고정 금리-원리금 분할 상환대출로 바꿔 나가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고정 상환을 늘리는 데 성과를 보였지만, 일시 상환을 개선하는 데는 미흡했다.

처음 적격대출이 만들어질 때 최장 5년 동안의 거치 기간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아 나가지 않고, 5년 동안은 이자만 내도 된다고 허락해 준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환 방식을 남겨 둔 셈이다. 그 결과 대출자의 52%는 일단 이자만 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래픽 참조〉 강경훈 동국대 교수는 "애초 거치 기간을 설정해 상품을 만든 것은 적격대출을 최대한 많이 팔아 보겠다는 공기업의 '실적주의'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집을 담보로 적격대출을 받은 사람 중 상당수는 거치 기간이 끝나거나 시중금리가 떨어지면 다른 대출로 갈아타 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학계 의견이다. 대출자들이 주택금융공사의 예상보다 빨리 빚을 상환하게 되면, 주택금융공사는 이 상환금을 따로 굴려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이에 따른 손해는 결국 세금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우려가 제기되자 주택금융공사는 올해 적격대출 대출분부터 최장 거치 기간을 2년으로 줄였다. 강 교수는 "거치 기간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적격대출의 성격에 맞는다"고 말했다.

저신용자에게 빌려주는 것도 문제

집을 담보로 신용등급 8등급까지 적격대출을 받게 해 준 것 또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과잉대출'이라는 점에서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공기업이 갚을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고 주장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담보물을 회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판 주택금융공사인 패니매는 신용등급 상위 60%까지만 '적격대출'을 해 준다. 이에 대해 주택금융공사는 지난해 적격대출을 받은 사람 중 4% 정도가 신용등급 7~8등급일 뿐, 전체 대출자의 신용등급 평균은 3등급이라고 말했다.

☞적격대출(conforming loan)

9억원 이하 주택을 담보로 최고 5억원까지 고정금리, 원리금 균등 분할 상환, 만기 10~30년 조건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융상품. 주택금융공사가 요구하는 규격대로 은행들이 상품 구조를 짠다는 의미에서 '적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