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3년 12월 30일, 20년 이상 인기를 끌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페이지북(가칭)'이 실적 부진으로 문을 닫는다. 전 세계 30억명의 회원은 페이지북에 올렸던 사진, 영상, 게시글을 두 달 안에 백업(보관)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페이지북 회원들은 일방적인 서비스 중단에 항의하고, 서비스 종료 후에도 '데이터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투쟁을 벌인다.

이는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가정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이미 디지털 데이터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시작됐다. 인터넷 포털부터 블로그, 온라인 카페, SNS 등에 자신이 남긴 발자취를 영구히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영상, 학창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 같은 것들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회원들에게 디지털 공간을 제공하는 서비스 업체 입장에선 이미 한물간 서비스에 남아 있는 데이터를 마냥 가지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에 따라 '데이터를 지키려는 자'와 '데이터를 날려버리는 자' 간의 피할 수 없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다.

◇'내 콘텐츠를 지켜라'…서비스 업체 상대로 소송 시작

1990년대 PC통신의 대명사였던 나우누리는 지난 1월 31일부로 서비스를 종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곳에 추억을 가진 나우누리 회원들은 "1994년부터 나우누리의 게시판 등에 쌓아온 저작물을 지켜야 한다"며 법원에 나우누리 서비스 종료를 금지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회원들은 '나우누리 살리기 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우누리를 인수, 별도의 법인을 설치하는 방안까지 계획 중이다.

이렇게 나우누리처럼 디지털 공간을 제공하던 회사가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종료하는 경우, 사용자의 데이터는 보호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인터넷 기업은 약관에 의해 사전에 서비스 종료 사실을 알릴 의무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사용자의 자료를 보관해주거나 백업할 의무는 이들에게 없다. 업체마다 저작물 관리 기준이 제각각이라 사용자들은 언제 자신의 데이터가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KTH는 작년 7월 포털 '파란'을 중단하면서 사용자에게 데이터를 백업하거나 이관하도록 두 달의 시간을 줬다. KTH의 전신인 '하이텔'이 생겨난 1991년부터 데이터를 차곡차곡 모아온 사용자들은 '두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파란을 운영하는 KTH 측은 적자만 늘어나는 상황이라 사용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번 달 문을 닫는 인터넷 커뮤니티 프리챌도 서비스 종료를 한 달 앞두고 사용자에게 저작물을 개별적으로 백업하라고 통보했다. 프리챌은 1999년부터 10년 넘게 서비스를 해왔고 약 110만개의 '커뮤니티'를 갖고 있지만, 계속된 적자로 서비스 종료를 서두르게 됐다.

작년 말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야후코리아는 데이터 백업 기간을 3개월에서 1개월로 갑자기 단축, 일부 이용자들이 피해를 봤다. 작년 12월 31일자로 미국 야후 계정으로 이관 절차를 밟지 않은 야후코리아 이용자의 메일, 사진 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서비스 업체들에 사용자의 디지털 저작물을 영구 보관해야 한다는 의무를 법적으로 부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해외 서비스인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경우 서비스 종료 시 디지털 데이터 문제가 불거질 것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자가 언제든지 계정을 통해 게시물, 댓글, 사진 등을 내려받아 보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테크앤로법률사무소 구태언 대표변호사는 "대부분의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이 향후 서비스 종료를 대비, 이용자 게시물 데이터나 개인 정보를 이관하는 절차를 약관에 마련해두고 있지 않다"며 "공정거래위원회나 소비자보호원에서 표준약관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유산'의 공개 여부도 잠재 이슈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의 경우엔 '디지털 유산'이 문제가 된다. 디지털 유산이란 개인이 사망한 이후에도 인터넷에 남아있는 신상정보와 사진, 글, 영상 같은 개인 데이터를 의미한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유산의 처리에 관한 일관된 규정이 없어 국가별·사례별로 처리 방식이 다르다.

국내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유족에게 넘겨야 할 법적 근거가 없어 서비스 업체의 이용 약관을 따르고 있다. 국내 주요 포털들은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은 친족·상속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제공할 수 없다고 자율적으로 정하고 있다. 2010년 천안함 희생 장병들의 유족은 SK커뮤니케이션즈에 싸이월드 계정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다만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친족이나 제3자가 미니홈피를 운영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5년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병사의 아버지가 야후를 상대로 아들의 이메일 계정 열람권을 달라고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야후는 비밀번호는 제공하지 않았고 병사가 받은 메일만 CD에 따로 담아 제공했다. 독일에선 유족이 사망자의 사망증명서와 유족 증명서류를 제출하면 고인 계정의 비밀번호까지 알려주고, 저장된 이메일과 주소록을 저장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