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28일 하루 동안 19원이나 급등했다. 하루 상승폭으로 16개월 만에 최대다. 환율은 지난 23일부터 나흘새 31.2원 급등해 약 3개월만에 1090원대로 올라섰다.

유럽은행들이 중앙은행의 장기대출을 대규모로 상환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환율을 끌어올렸다. 국내에 유입된 유럽계 자본이 유출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또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 등 북한 리스크 부각과 최근 환율 급락에 따른 차익 실현 매물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유럽 변수, 외국인 투자가들의 주식 매도 등으로 일시적으로 환율이 반등하는 형국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시적 변수들이 잠잠해지면 환율이 하락 추세로 다시 되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 경제의 펀더멘털, 재정건전성, 경상수지 흑자 등 중장기적으로 여전히 환율 하락 요인이 우세하다는 설명이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그동안 원화 강세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일방적으로 형성돼 있었다가 반(反)작용이 촉발되면서 조정국면을 거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무질서해 보이지만 근거없는 불안감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크게 우려할 만한 단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최근 환율 하락 과정에서 환율 변동폭이 커진 만큼 이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마련돼 있다"고 덧붙였다.

◆ 환율, 하루에 19원 급등해 단숨에 1090원대

환율은 최근 4거래일 동안 31.2원 상승해 단숨에 1090원대로 올라섰다. 지난해 11월초 1090원이 붕괴된 이후 1060원선 밑으로 내려가기까진 두 달 이상 걸렸지만 다시 1090원대를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주였다.

2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9원 오른 1093.5원으로 거래를 마쳤다.(원화 가치 하락) 지난해 10월29일 1095.8원을 기록한 이후 약 3개월 만에 최고치다. 환율 하루 상승폭이 19원이나 된 것은 2011년 9월 26일(1195.8원) 전 거래일 대비 29.8원 상승했던 이후 처음이다.

이날 환율은 유럽은행들의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 상환 소식에 개장가부터 7.5원 오른 1082원으로 출발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5일(현지시각) "2011년 말과 작년 초 중앙은행에서 LTRO를 이용했던 은행 중 278곳이 오는 30일 총 1372억유로(약 200조원)의 대출금을 상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국내에 유입된 유럽계 자본이 회수되면서 자본이 유출될 것이란 우려에 환율이 급등했다.

국내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이 6거래일 연속 순매도에 나선 것도 환율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인은 지난 21일 순매도로 돌아선 후 25일과 이날만 합쳐도 1조원이 넘는 주식물량을 팔아치웠다. 외국계 자금 유출이 지속되자 오후 2시 30분쯤 환율은 1085원을 넘어섰고 이에 역외 참가자들이 공격적인 손절매수에 가세하면서 30분만에 1093원대로 급등했다. 이대호 현대선물 연구원은 "그동안 선진국의 양적완화 등 때문에 우리나라의 펀더멘털 수준 이상으로 단기에 빠르게 유입됐던 자금들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 유로존 호재, 외국인 주식 매도 등으로 단기 급등…"일시적 요인"

환율이 이렇게 단기간에 급등한 것은 최근 유로존 경제지표가 호조를 보이고 유럽은행들이 대출금을 조기 상환하는 등 유로존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최근 "금융시장이 연초부터 상대적인 안정세를 보이고 있고, 모든 지표들도 금융시장 여건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년 전 중앙은행에 손을 벌렸던 유럽은행들도 이제는 서둘러 빚을 갚고 있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1월 초까지 원화 환율이 달러 대비 엔화의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면 최근에는 유로화 환율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최근 유로존 호재로 원화와 미 달러화를 팔고 유로화를 사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원화는 그동안 절상폭이 컸기 때문에 차익실현 물량이 많다는 설명이다.

국내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 영향도 있다. 세계적인 상장지수펀드 운용사인 뱅가드 펀드가 펀드 운용 기준(벤치마크)을 변경하면서 국내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이 연일 주식을 팔아치우고 있다.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순매도한 자금을 달러로 환전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지난 21일부터 외국인은 국내 증시에서 5거래일 연속 순매도에 나섰다. 이는 지난 10일부터 뱅가드펀드의 벤치마크 변경에 따른 물량이 빠져나간 데 따른 영향이다. 뱅가드 펀드는 벤치마크를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에서 파이낸셜타임스스톡익스체인지(FTSE) 지수로 변경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MSCI 기준으론 신흥국, FTSE 기준 선진국으로 분류된 상태다. 뱅가드는 주로 신흥국 투자 비중이 높아 매주 4%씩 총 111개 종목에 대한 한국물 비중을 줄여나가기로 결정했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외국인들이 뱅가드펀드의 벤치마크 개편에 따라 포트폴리오 재편에 나선 것이 원화 환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그동안 원화 거래를 통해 얻은 환차익을 실현하려는 움직임도 함께 영향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 1060원선 붕괴 뒤 개입 우려 높아져…장기적으로 원고ㆍ엔저 추세는 지속될 것

외환 전문가들은 최근 환율 급등에는 외환 당국이 실개입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가 기저에 깔려있다고 입을 모았다. 원화 환율이 1060선 아래로 떨어진 이후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외환당국 관계자들은 환율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관련 대책에 대한 강경 발언을 쏟아냈었다.

하지만 현재의 원화 약세는 일시적이며 장기적으로는 원고(高)ㆍ엔저(低)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정영식 연구원은 "2월 중순으로 예정된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회의, 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일본의 양적완화가 논의될 경우 과도한 양적완화를 추진하는 데 제동이 걸릴 수 있다"면서도 "그래도 우리나라의 펀더멘털, 재정건정성, 경상수지 흑자 등을 고려하면 장기적으로는 추가적인 원화 강세, 엔화 약세 기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1월 초 움직임이 과하다는 인식 하에 원화, 엔화가 모두 조정을 받는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원고(高)ㆍ엔저(低)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외국인 매도세에 대해 "그동안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이 유입되는 것을 봐도 연간으로는 계속 유입됐지만 월간으로 보면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했다"며 "현재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이 나가는 게 한 방향으로 추세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전승지 연구원도 달러매도를 뜻하는 수출업체의 제고물량 유입으로 인해 "큰 그림으로 보면 아랫쪽(환율 하락)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