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전 한은 부총재는 지난 7일 퇴임사에서 "글로벌과 개혁의 흐름에 오랜 기간 힘들여 쌓아온 과거의 평판이 외면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서 김중수 총재 2년을 비판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KDI(한국개발연구원)맨’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을 한 곳이 바로 KDI다.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둥지를 튼 곳도 KDI다. 김 총재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KDI원장을 지내며 KDI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KDI맨들은 사회 곳곳에 포진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부분보다 정치권에서 이들의 역할이 돋보인다. 정부 경제정책의 씽크탱크 역할을 한 경험을 살려 유력 대선후보의 정책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에서는 KDI 연구위원 출신인 이혜훈, 유승민 의원 등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참모로 활동 중이고, 민주통합당에서는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경제 민주화 공약을 이끌고 있다.

이들과 같이 '밖에 있는' KDI맨들의 활약에 대해 김중수 총재는 아주 만족스로운 평가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석에서 KDI맨들의 활약상에 대해 극찬을 하면서 한국은행 출신들의 정계진출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강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취임 이후 한은법 개정 작업을 이끌면서 금융당국의 방해에 직면할 때 국회안에서 도움을 줄만한 인사가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 이런 인식을 만들게 한 것으로 주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김중수 총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밖에 있는 한은맨’ 들의 존재감이다. 이들은 입행 이후 유학을 다녀와 30대 중후반대에 외부 연구소나 대학에 진출했다. 주로 경제학계에 두터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놓고 있다.

밖에 있는 한은맨들이 가장 몰려있는 곳은 바로 금융연구원이다. 박재하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DBI) 부소장, 장민 금융위원장 자문관 등이 금융연구원에 둥지를 튼 한은맨들이다. 금융연구원에는 이 밖에도 이명활 국제거시경제실장, 이병윤, 이윤석, 박성욱, 임형석 연구위원 등이 재직 중이다. KDI에서 거시경제분석을 책임졌다가 지금은 SK경영경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김현욱 박사와 조세연구원의 박형수 박사도 한은맨 출신이다.

한은맨 출신 경제학자들은 각 대학으로도 뻗어나가 있다. 최창규 명지대 교수, 최용석 경희대 교수, 송준혁 외대 교수, 하준경 한양대 교수, 강경훈 동국대 교수, 한재준 인하대 교수 등이 그들이다. 참여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던 강철규 우석대 총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전 서울대 총장)도 한은을 거친 인사들이다.

이런 한은맨들의 존재는 '안에 있는 한은맨'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2009년 한은법 개정 논란이 뜨거웠을 당시 한은맨 출신 교수들은 각종 토론회 등에 나가 한은에게 금융회사 조사권을 일부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대부분 해외대학 박사 출신들의 입지가 좁았던 한은을 뛰쳐나온 인물들이지만 물가 당국으로서 한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대체로 갖고 있다. 한은이 보다 경제원론에 나와있는 역할에 가깝게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김중수 총재 취임 2년간 한은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물가불안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밖에 있기 때문에 안에 있는 한은맨들보다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은을 평가하고 이들의 평가는 전문가들의 시각으로 각종 언론 지상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이들이야 말로 김중수 총재에게 가장 엄격한 채점관이라 할 수 있다.

지난 7일 이주열 한은 부총재가 퇴임했다. 그는 한은 입행 35년을 마감하는 퇴임사에서 “글로벌과 개혁의 흐름에 60년에 걸쳐 형성된 고유의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되면서 혼돈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면서 김 총재를 정면 비판했다. 그는 또 “물가안정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외부의 냉엄한 평가에 금융통화위원회 일원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정책 실패를 자책했다. ‘밖에 있는 한은맨’으로 옷을 갈아입는 첫날 화끈하게 존재감을 과시한 셈이다. 김 총재에게는 대단히 엄격한 시어머니가 한명 생긴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다. ‘밖에 있는 한은맨’으로서 이 전 부총재가 어떤 역할을 할지도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