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의 가계는 빚을 줄이는 '디레버리징'에 나서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딴판이다. 각국 자금순환 계정을 참고하면 미국, 영국, 일본의 가계부채 대비 가처분 소득 비율은 지난 2007~2008년을 기점으로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줄곧 오름세를 이어가면서 2010년말 132%로 미국(125%)보다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가계부채는 기업 부채와는 달리 국민들의 삶과 직접 연관이 있어 문제가 발생할 경우 사회적인 교란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우리나라 국가 신용등급 상향 조정의 조건으로 가계 부채 문제 해결을 꼽았다.

#2. 1970~1980년대 30%를 넘어섰던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기준 가계저축률은 3.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 내외)보다 낮다. 또 1995년(17.4%)과 비교해서는 4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지금 당장 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계부채의 덫에 걸려들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만연했던 ‘빚 권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지 못해 위험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일례로 돈이 필요할 때마다 금융회사의 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는 가장이 늘고 있다. 벌이는 시원찮고 저축액은 적은데 집값은 여전히 비싸고 생활비는 나날이 늘고 있다. 20여년 전의 가장이 주로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면 이 시대의 가장은 집은 물론 생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대출을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런 가계 대출 급증엔 ‘공급’도 한몫했다. 외환위기 이전 시절 주요 대출 고객이었던 우량 대기업들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은행들은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가계 대출 문턱을 적극적으로 낮췄다.

가계 소득은 별로 늘지 않고 원리금 부담에 소득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가운데 이전보다 싼 값(저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다보니 빚이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은 점점 아래로 밀리는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지갑이 얇아진 이들은 소비를 꺼리기 마련이고 이는 결국 내수가 위축돼 경제 성장의 열기가 식는 결과를 낳는다. 바로 가계부채의 덫이다.

일러스트=조경표

정부-금융권-가계 합작품 '가계부채'

가계부채가 우리나라 경제를 옥죄는 존재로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정부, 금융회사, 가계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그동안 가계부채 문제에 안이하게 대처해 왔고, 금융회사들은 실적을 위해 개인들의 상환능력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경쟁적으로 대출을 확대해 왔다. 그렇다고 개인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빚은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문제의 출발점은 IMF 외환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여파로 기업 대출 수요가 급감하자 금융회사들은 자금운용의 활로를 가계대출에서 찾았다. 이러한 상황이 대대적인 감원 등으로 소득이 줄어든 가계의 대출 확대 유인도 맞아떨어졌다. 가계부채가 1999년 214조원에서 2002년 439조원으로 3년 새 두배로 급증한 배경이다. 급기야 2003년 카드대란이 터지면서 우리나라에서 가계대출 부실이 처음으로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험으로 전이되는 사건이 등장한다.

그 이후 잠잠했던 가계대출은 2005~2006년 주택시장 호황으로 또다시 급격히 증가한다. 가계부채는 2005년 521조원에서 2년만인 2007년 630조원으로 100조원 이상 늘어났다.

◆ 양극화의 진원 가계빚…소득은 안 느는데 빚은 척척 쌓여

일반적으로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가계소득이 늘면 가계부채도 일정한 비율로 증가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성장이 둔화되고 가계소득이 정체된 가운데 가계부채가 급증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우리나라가 직면한 상황이 이러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소득보다 빚이 훨씬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4년 1분기만해도 실질 국민총소득(GNI) 증가율은 4.5%(전년 동기 대비 기준)로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 증가율(2.1%)을 두 배 이상 앞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소득 증가율이 빚 증가율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지난해 3분기 GNI 증가율은 0.8%로 가계신용 증가율(9%)에 한참 못미쳤다.

특히 소득이 낮은 가계의 빚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게 문제다. 통계청,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작성한 '2011년 가계금융조사'를 보면 소득 하위 20%(1분위)의 금융부채 비율은 201.7%로 상위 20%(5분위, 103.2%)의 두 배에 달했다.

소득 분위별 자산과 부채의 구성을 면면히 살펴보면 양극화 정도는 더욱 심각하다. 1분위는 자산의 절반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이다. 중산층이라 볼 수 있는 3, 4분위도 자산의 40% 이상이 거주주택이다. 부동산 시장이 악화되더라도 앉아서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거주주택이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4분위와 달리 최상위 계층인 5분위는 살고있는 집(34%)보다 다른 부동산 자산(38%)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가계부채의 질도 소득이 낮을수록 확연히 악화된다. 5분위의 신용대출은 10% 이하지만 1분위는 30%에 달하고 있다. 이는 저소득층이 대체로 담보 자산이 적어 신용으로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다 대출 용도에서 생활비 마련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백웅기 상명대학교 교수는 "소득 격차가 점점 확대되고 중산층이 얕아지는 가운데 일반 가계의 빚 부담은 계속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면 가계 부채의 양극화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며 "대내외적 충격이 발생하면 저소득층의 충격은 상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가계부실→실물경제 위축→국가 경제 위기 소용돌이

가계부채는 경제가 그럭저럭 성장하고 있을 때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경제가 가계부채 문제를 감내할 능력을 잃어버릴 경우 가계의 위기로 나타날 수 있다.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소득이 줄고 원금 상환 압력이 높아지면→소비는 줄고 개인 파산이 증가해→자산시장 위축과 금융권의 부실화가 초래되고→결국 내수 부진이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각에선 저소득층의 대출 증가가 은행권에 미칠 파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다만 아직까진 은행권에서 '시한폭탄'이 터질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은행의 연체율은 0.7% 수준으로 미국의 우량 대출 연체율(2% 내외)보다도 훨씬 낮고 DTI(총부채상환비율)와 LTV(주택담보대출비율) 규제라는 강력한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선 가계대출 악화가 금융권에 미칠 영향보다 실물 경제에 미칠 영향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다봤다. 경기 둔화와 일자리 부족으로 저소득층의 소득이 충분히 늘어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소비 위축과 경기 회복세 둔화라는 악순환을 맞닥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 4% 채 안되는 가계저축률 '성장 타격'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가계저축률은 1998~2002년, 2004~2008년 두 차례에 걸쳐 큰 폭으로 하락했다. 외환위기 직후엔 소득 둔화가 저축률 하락의 원인을 제공했고, 2000년대 중후반엔 저금리와 부동산 값 상승으로 주택대출 중심의 가계 빚이 크게 늘면서 저축 여력이 줄었다.

저축률이 20%를 웃돌던 시절에는 소비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저축률이 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빈번히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축률의 급속한 하락은 경제 성장의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문외솔ㆍ손민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가계저축률이 1%포인트 하락하면 경제성장률은 최대 0.15%포인트 둔화되며, 총고정투자율은 0.36%포인트,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소비 비중도 0.25%포인트 하락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잠재 경제성장률이 3% 후반으로 낮아진 상황에서 가계저축률 하락에 따른 충격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저성장이 장기화되는 배경엔 낮은 저축률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미국 경제가 휘청이기 전 가계저축률은 제로(0%)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