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

1978년 중국의 실력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해 중국에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은 “제철소는 사람이 짓습니다.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포항제철은 기적입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그렇다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최고실력자까지 반하게 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기적처럼 한국에 철강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 "고속도로는 내가 감독할테니 제철소는 자네가 맡아라"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대한중석 사장을 맡고 있던 박태준에게 제철소를 지으라는 특명을 내린다. 지시는 내려왔지만 처음부터 막막한 상황이었다. 세계은행(IBRD)은 한국이 제철소를 갖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고, 선진국들은 제철소 건설을 위한 차관 제공을 철회했다.

선진국의 차관 도입이 불가능해지자 박 회장은 일본을 떠올렸다. 1969년 한일각료회담에서 농업지원분야에 사용하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박 회장은 한일각료회담을 앞두고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했다. 결국 일본은 우리나라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은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지게 됐다.

하지만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 회장은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었다.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았기에 의심을 받지 않았지만, 박 회장의 뒤를 따르던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자"

일본으로부터 제공 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 회장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다.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

박 회장은 1기 준공과 동시에 2기 건설에 착수했다. 중동 붐이 불면서 공사 현장에 일손 구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포항제철은 1976년 2기를 준공했다. 포항제철은 2기 건설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기술도 도입해서 설비다변화를 시도했다. 또 전체 조강능력이 연산 400만t으로 늘어나 북한의 320만t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박 회장은 포항제철이 맨 손에서 빠른 속도로 철강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 완벽주의를 꼽는다. 박 회장은 제철소를 지으면서 부실공사 불허라는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1977년 3기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발전송풍설비를 폭파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박 회장은 발전송풍설비 공사 현장을 감독하던 중 10cm가량 콘크리트가 덜쳐진 곳을 발견했다. 그는 다음날 건설현장 책임자와 간부, 외국인 기술 감독자, 포철의 임직원을 모두 부른 가운데 공사가 이미 80%까지 완성된 콘크리트 구조물 폭파식을 거행했다. 이 폭파식은 모범적인 경영관리의 사례로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MIT 경영학 교재에 소개되기도 했다.

◆ 권력 쟁투에 시련 겪은 경제신화

박 회장은 1980년 국가보위 입법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전까지는 정치와 선을 그었지만, 이때부터 박 회장은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11대, 13, 14, 15대 국회에 잇달아 진출했고, 1990년에는 집권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에 오르기도 했다. 3당 합당 후에는 민자당 최고위원도 했다. 하지만 1992년 박 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의 골이 심해지면서 민자당을 탈당했고, 1993년에는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박 회장은 일본으로 떠났고, 일본에서 13평짜리 단칸방에 살면서 재기를 노렸다고 한다.

1997년 4년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박 회장은 포항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자민련 총재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0년 5월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정계를 완전히 떠났다. 4선 의원에 집권당 대표와 총리까지 지냈지만 박 회장의 정치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경제계에서는 신화를 쓴 인물이지만 정치공학에는 서툴렀기 때문이다.

◆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2011년 9월 19일 포항시 지곡동 포스코 한마당 체육관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박 회장이 포스코에 재직하던 시절 함께 근무했던 퇴직직원들과 함께하는 만남의 행사가 열린 것이다. 이 자리에는 만 55세 이상의 퇴직자 370여명이 참석했다.

박 회장은 퇴직직원들에게 “눈부신 성장을 이룬 오늘의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피땀 흘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청춘을 바쳤던 그날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현대사 속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당부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회장의 모습이 대형스크린에 잡히자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이 자리가 박 회장이 포스코의 옛 친구들을 만나는 마지막 자리가 됐다. 1968년 16억원의 자산으로 시작한 포스코는 40년 뒤인 2008년에 자산 37조335억원, 매출액 30조6424억원, 조강생산량 3313만6000t을 달성했다.

박 회장에 대한 위인전을 쓴 소설가 조정래 씨는 “‘단군 이래의 최대 기적’이라 부르는 한국의 경제발전 중심엔 박태준 명예회장이 있었다”며 “수조원의 순이익을 내는 회사를 키우고 조용히 물러난 진정한 철강왕이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