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중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미국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최고위 인사로부터 국제전화 한 통을 받았다. 유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국제 공조 방안을 논의하자는 제안이었다. 기대했던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증산(增産) 합의가 무산되자 국제 유가가 다시 급등하고, 덩달아 미국 휘발유 가격도 갤런(3.78L)당 4달러에 육박하던 비상 상황이었다. 국내에서도 정유사의 기름값 100원 할인 종료를 앞두고 일부 주유소에 기름 공급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도 같은 내용의 공조를 요청했다. 한·미·일 3개국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쌓아 둔 '비축유' 방출에 합의했고, 즉각 석유 소비국으로 구성된 국제에너지기구(IEA)에 이를 제안했다. 이후 28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IEA 차원에서 비밀리에 비축유 방출 논의가 진행됐고, IEA는 지난달 23일 회원국 만장일치로 12개 회원국이 총 6000만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IEA 발표에 국제 유가는 하루 만에 5% 가까이 폭락했다.

IEA 출범 37년 동안 세 번째이자 2005년 이후 6년 만인 비축유 방출 결정은 이처럼 한·미·일 3국의 논의가 출발점이었다. 석유 소비국 최후의 보루인 비축유 방출에 세계 8위 석유 소비국인 한국이 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주도했지만 이 과정에 한국 정부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IEA, 사상 세 번째 비축유 방출

IEA는 제1차 석유파동 직후 석유공급 위기에 공동 대응을 목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중심으로 1974년 11월 설립됐다. 최초 16개국이 참여했고, 현재는 28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나라는 2002년 3월 가입했다.

IEA가 산유국에 대응할 수 있는 최대 무기가 바로 비축유다. IEA 회원국은 하루 평균 석유 순수입량을 기준으로 최소 90일분의 석유를 비축해야 한다. 28개 회원국이 보유한 비축유는 총 41억배럴로 146일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우리나라의 비축유 규모는 원유와 석유제품을 포함해 1억7300만배럴(정부 8700만배럴, 민간 8600만배럴)로, 191일치 분량이다.

이번에 방출을 결정한 6000만배럴은 회원국 전체 비축유의 1.5%. 이번 비축유 방출 규모는 세계 석유 소비량의 1%를 넘는 12개 회원국이 소비량을 기준으로 방출 물량을 배정받았다. 미국이 전체 절반인 3000만배럴을 맡았다. 한국은 하루 석유 소비량(210만배럴)의 1.5배인 346만배럴을 이달 말까지 방출한다. 12개 비축유 방출 국가 중 네 번째로 많은 규모다.

IEA는 "리비아 원유 생산 차질과 북반구 '드라이빙 시즌(여름철 자동차를 몰고 휴가 떠나는 시즌)' 수요에 대비한 원유 수급 안정이 목표"라며 6년 만의 비축유 방출 이유를 밝혔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의 증산 물량이 시장에 유입될 때까지 원유 가격 조정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IEA는 국제 원유시장 상황에 따라 추가 방출 가능성도 밝혔다. 지경부 관계자는 "증산 계획을 밝힌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OPEC 회원국의 증산 물량과 리비아의 생산 차질 해소 여부가 추가 방출 여부를 결정하는 데 주요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일부터 방출… 기름값 하락 요인 될 듯

정부는 IEA 결정에 따라 전체 346만배럴 중에서 원유 200만배럴, 석유제품 146만배럴(휘발유 40만배럴, 경유 106만배럴)로 나눠 국내 정유 4사(社)에 물량을 배정했다. 원유 방출이 많았던 2005년과 달리 방출 효과가 즉각 나타날 수 있는 석유제품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지난 1일 휘발유 5만배럴이 경기도 용인의 석유공사 비축기지에서 첫 방출이 이뤄져 수도권 주유소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5일에도 경유 2만배럴이 풀렸다. 석유제품 비축유는 주로 경기도 용인 비축기지에서 송유관을 통해 판교저유소로 옮겨지고, 정유사 유조차를 통해 일선 주유소에 공급된다.

비축유 방출로 급락했던 국제유가는 그리스 재정위기 해소와 미국 원유 재고 감소로 이전 수준까지 회복됐다. 신영증권 오정일 연구원은 "비축유 방출 발표로 의한 심리적 효과로 유가가 급락한 뒤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며 "하지만 석유 시장에 실제 비축유가 유입되면 유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